“하나님, 당신께 실망했습니다” 정말 공감이 가는 말입니다. 요즘에는 하루에도 열 두번씩 하고 싶은 말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말은 제가 한 말이 아니라 필립 얀시라는 분이 쓴 책 제목입니다.
저도 몇 년 전, 이 책 제목이 공감이 가고 마음에 들어 이 책을 읽었습니다.
그러면 이 책 제목이 왜 공감이 갈까요? 공감을 넘어 통쾌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다면, 이 책 제목을 보면서 통쾌하다는 생각이 드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아마, 코로나와 전쟁 등 그야말로 어려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의 현실 때문이 아닐까요?
말라기 시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께 “주님께서는 악한 일을 하는 사람도 모두 좋게 보신다. 주님께서 오히려 그런 사람들을 더 사랑하신다.” (말 2:17)라고 항의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들은 왜 이렇게 말하고 있을까요?
역사를 거슬러서 보면, BC 586년 남왕국 유다는 바빌로니아 침공 때문에 멸망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은 물론이고 예루살렘 성까지 모두 파괴되었고, 많은 사람들은 바빌로니아에 포로로 잡혀가게 되었습니다.
영원할 것만 같이 기세 등등했던 바빌로니아도 불과 70년 만에 힘도 한 번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허무하게 신흥 강국이었던 페르시아에게 패권을 내주고 말았습니다.
덕분에 포로로 잡혀갔었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생각을 해보면, 이 사람들이 포로로 잡혀 가기는 했지만 그곳에서 자리를 잡고 대를 이어서 살았으니 이미 그곳이 살기에도 좋았을 것입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온다는 그 자체가 쉬운 결정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거기다가 폐허가 되어서 아무것도 없다시피 한 곳으로 돌아오는 자체가 쉬운 결정을 아니었을 것입니다. 아무것도 없다시피 한 곳에서 하루하루 먹고 살고 버티는 것도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학개와 스가랴 같은 예언자들 그리고 스룹바벨과 느헤미야 같은 정치적인 리더들의 권유에 따라서 무너진 예루살렘 성벽과 하나님의 성전을 재건하기 위해서도 힘을 모았습니다. 대단한 믿음이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게 다였을까요? 이스라엘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나 열정이 있었습니다. 거기다 하나님의 축복이 물질적인 면으로 나타나기를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성벽과 하나님의 성전재건이 되었지만, 다시 수십 년, 이제 100년이 넘게 지나가는 동안 예언자들이 외쳤던 꿈과 희망이 넘치는 일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경제적으로 더 힘들고 어려워졌습니다. 직업을 잃고 실직자로 전락한 사람들은 점점 더 늘어나고 있었고, 페르시아에서 온 권력자들에게 납부해야 하는 세금은 큰 부담이 되고 있었습니다.
성전을 짓기 위해서 거두었던 성전세도 부족하게 됐고, 레위 사람들까지도 농업에 종사해야 하는 지경이 됐습니다.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사람들은 자녀들을 노예로 팔게 되었습니다.
비록 포로로 잡혀 가기는 했지만, 그동안 대를 이어 거기서 자리 잡고 살고 있었는데, 그렇게 편안하고 익숙한 것들을 전부 포기하고 믿음으로 이스라엘로 돌아온 것이었습니다.
정말로 힘들었지만 자신들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성전을 재건했습니다. 이 정도까지 했으면 하나님께서도 자기들에게 뭔가 보답을 해 주셔야 하는 게 아니냐는 논리입니다.
그렇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더 나빠졌습니다. 페르시아와 이스라엘 주변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을 괴롭히는 이방 민족들은 기세가 등등했습니다. 더 잘나가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되니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실망과 낙심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소망이 없어졌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헤이 해졌고, 예배도 형식적으로 엉터리로 드렸던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대해 불만을 토로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악한 일을 하는 사람도 모두 좋게 보신다. 주님께서 오히려 그런 사람들을 더 사랑하신다.” (말 2:17)
한국 나들목 교회 김형국 목사님은 믿음에 대해 이렇게 말씀합니다. “성경적 믿음은 내게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하나님에게 얻어내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게 필요하다고 생각하셔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루신 일과, 앞으로 이루시겠다고 성경에서 약속하신 일을 믿는 것이다.” 그래서 “믿음은 하나님을 조작하는 수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전인격적으로 수납하는 것이다.”라고 정의합니다.
말라기 시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신들의 믿음을 하나님을 조작하는 수단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우리도 믿음이라는 거룩한 말 뒤에 숨어서 믿음을 하나님을 조작하는 수단으로 만들어 버린 것은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