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단무지가 이 세상에 남은 마지막 단무지가 아닌 것처럼…
아마 여러분들께서도 벌써 잘 알고 계시는, 이미 오래된 우스갯소리입니다. 최근에 책을 읽다가 보니까 그 책의 저자가 예화로 그 얘기를 사용하였습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하루는 람보가, – 람보 아시죠? 저도 좋아하는데, 액션 배우인 Sylvester Stallone이 주인공인 람보 역할을 했던 액션 영화입니다. – 하루는 람보가 친구와 함께 짜장면을 먹다가, – 람보가 미국 사람인데 왜 친구와 짜장면을 먹겠습니까? 그저 웃자고 하는 이야기이겠죠? – 아무튼 람보가 짜장면을 먹다, – 짜장면을 먹으면 당연히 단무지도 먹어야겠죠? – 마지막 하나 남은 단무지를 친구와 먹겠다고 동시에 젓가락으로 잡았다고 합니다. 람보와 친구는 그 마지막 남은 단무지를 서로 먹겠다고 양보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신경전을 벌이다가 람보 친구가 람보에게 이렇게 제안했다고 합니다. 람보 친구는 람보에게 “서로 상대방을 한 대 때리자. 그리고 울지 않는 사람이 이기는 거로 하자.”고 했다고 합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힘이라면 자신 있었던 람보가 좋다고 했다고 합니다. 먼저, 람보 친구가 람보를 세게 때렸습니다.
람보 친구가 람보를 얼마나 세고 맵게 때렸는지 람보 눈에 눈물이 핑하고 돌 정도로 아팠습니다. 그렇지만 그 마지막 남은 단무지를 먹겠다는 일념으로 힘겹게 참아냈습니다.
자, 이번에는 람보의 차례가 되었습니다. 람보가 친구에게 잔뜩 주먹을 겨누었습니다. 람보 친구에게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그 순간에 람보 친구가 람보에게 외쳤습니다. “잠깐! 내가 졌어. 네가 이겼어. 이 단무지는 네 거야. 이 단무지 네가 먹어.” 그러자 람보가 씩 웃으면서 “자식! 그러면 그렇지, 까불고 있어! 한 주먹 감도 안 되는 녀석이…” 그렇게 생각을 하면서 의기양양하게 그 마지막 남은 단무지를 젓가락으로 집으려는 순간, 람보 친구가 다시 한번 소리쳤습니다. “사장님, 여기 단무지 한 접시만 더 가져다주세요. 감사합니다.”
물론 웃자고 하는 우스갯소리입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는 람보와 람보 친구가 그 마지막 남은 단무지를 놓고서 서로 먹겠다고 신경전을 벌이던 상황을 이렇게 이해했었습니다. “그 마지막 남은 단무지는 마지막이기 때문에 더 이상 단무지를 먹을 수 없다.” 또 “그 단무지는 이 세상의 마지막 남은 단무지이다.” 람보 친구가 람보에게 패배를 인정할 때도 상황 판단을 하지 못했습니다. 람보 친구의 마지막 대사를 듣고서야 속았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이럴 것이었으면, 처음부터 하나 남은 마지막 단무지를 서로 먹겠다고 싸울 필요도 없었고, 죽기 살기로 내기를 할 필요도 없었을 것입니다. 물론, 웃자고 하는 우스갯소리인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뭘 그렇게 우스갯소리에 목숨 거냐?”고 치부해버리고 말 것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비록, 단무지는 아니지만, 이 마지막 남은 단무지를 가지고 먹겠다고 세게 때려서 울지 않는 사람이 이기는 것으로 하자고, 이기려고 세게 맞고도 울지 않으려고 참고 그렇게 하지는 않지만,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마지막 남은 단무지처럼 마치 이 세상에 마지막 남은 단무지처럼, 이것이 마치 세상 전부인 것처럼 목숨을 걸고서 그렇게 덤벼드는 것이 있습니다.
람보 친구처럼 식당 사장님에게 단무지 한 접시만 더 달라고 하면 될 것인데, 람보처럼 이기겠다고 억지로 눈물이 핑 돌 정도로 아픈 것도 참아가면서 우리 역시 그 상황 가운데에만 몰두하고 있다면, 그 상황 가운데만 매몰돼 있다면, 그 상황 밖을 생각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람보처럼 그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 기도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우리 기도제목도 보면, – 온갖 미사여구 거룩한 말로 위장하고 있지만, 결국은 건강을 위해서, Business를 위해서, 우리 교회를 위해서, 우리 아이들 위해서, 이런 식입니다. 그렇지만 사실 마음먹고 이런 기도 제목은 빼고, “하나님과 관계가 깊어지게 해달라.”는 식의 기도만 한다면, – 실제 제가 그렇게 해봤습니다. – 제대로 기도를 안 한 것 같기도 하고, 기도했는데도 왠지 개운하지 않았고, 기도를 제대로 하기는 한 것인가 이런 마음도 들고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누구신가?”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 기도는 우리 신앙의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구원의 능력을 믿어야, 믿을 수 있어야만 기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도 살아 계셔서 이 세상 모든 일을 계획하고 주관하고 다스리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그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