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누아투”(Republic of Vanuatu)라는 나라를 들어본 적이 있으십니까?
지도 상에서 호주 오른편에 위치한 바누아투는 80여 개의 섬들로 이루어진, 인구 약 28만 명의 작은 나라입니다.
번지점프가 유래한 나라로도 유명합니다. 바누아투 군도는 17세기 초까지 남태평양의 미탐험 지역으로 남아있다가 포르투갈 사람들에 의해 발견되었습니다.
당시 바누아투는 씨족 단위로 구성되어 유지되고 있던 국가였습니다. 통상적으로 씨족 간에 분쟁이나 갈등들이 생길 법도 한데, 그들만의 독특한 사회 풍속들은 평화와 공존을 추구하는 것이어서, 탐험가들의 호기심을 자아내기에 충분했습니다.
예를 들어, 그 섬에는 다수결의 원칙이 없었다고 합니다. 어떤 선택에 이의를 제기하는 주민이 있으면 이들은 만장일치에 이를 때까지 토론을 벌였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당시 원주민들은 일과의 3분의 1을 토론으로 보냈다고 합니다.
어떤 영토와 관련 논란이 생기면, 합의에 도달할 때까지 몇 년, 아니 심지어, 몇 세기 동안이고 토론이 이어졌다고 합니다. 그런데 오랜 기간 동안 토론을 하다 보면 그동안 문제가 더 이상 문제가 아니게 사라져버리는 경우가 허다했고, 결론에 도달할 경우엔 모두가 만족했기 때문에 누구도 패자가 없었다고 합니다.
또한, 씨족들마다 특정 산업이 발달했기 때문에 물물교환이 정착되어 있었는데, 독특하게도 이 교환하는 물건의 목록에는 자녀들도 포함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농사를 기반으로 하는 씨족에서 속한 자녀가 토기 제조에 소질을 재능을 보이면 그 아이는 자기 씨족을 떠나 어떤 도공의 가정에 입양됩니다.
그리고, 아이를 입양한 도공 집안은 그가 재능을 발휘하도록 도와주어야 했으며, 도공의 자식 중에서 농사를 짓고 싶어 하는 아이를 반대편 가정에 입양을 보내는 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풍속을 몰랐던 탐험가들은 이 광경을 보고 충격에 빠졌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아이들을 인신매매하는 것으로 알았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들의 자녀들이 살고 있는 씨족들과 전쟁을 벌이거나 침공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는 점입니다.
개인적인 분쟁이 생기는 경우, 바누아투인들은 당사자들이 직접 나서지 않고, 씨족 간 동맹 체제를 이용해서 해결했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A족 남자가 B 족의 여자를 폭행했다면 두 씨족은 직접 싸움을 벌이지 않고, 각기 자신들과 동맹을 맺고 있는 다른 씨족들에게 부탁해서 전쟁 대리인을 내세웠습니다. A 족에게 싸움을 부탁받은 C 족과 B 족에게 싸움을 부탁받은 D 족은 대신 싸워 주기는 하지만, 자신들의 일이 아니기 때문에 치열하게 싸울 필요성을 못 느꼈습니다.
처음 격돌로 약간의 사상자가 생기고 나면, 자신들의 동맹의 의무는 다한 셈이기 때문에 금방 전투를 정리하고 승패를 정했다고 합니다.
감정이 격해질 대로 격해진 당사자들이 직접 싸우지 않기 때문에 “트로이 전쟁”과 같은 비극은 없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고대 바누아투에는 전쟁은 있으되, 단지 증오 없는 전쟁, 쓸데없는 자존심 때문에 악착같이 싸우며 무고한 희생을 치르는 전쟁은 없었다고 합니다.
바누아투 풍속의 일면을 접하면서 현재,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는 우크라이나 전쟁 상황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형언할 수없이 가슴 아픈 비극을 겪고 있는 현지인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지는 침통함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특정 지역 주민을 해방시킨다’는 허울 좋은 명목 뒤로는 구시대 유물인 제국주의적 영토 야욕에 대한 천착을 뻔히 드러내 보이고 있습니다.
거기에다 자신의 입지를 다지려는 한 지도자의 정치적 자존심에 따라 각료들은 부화뇌동하고 있습니다.
이런 모습들은 원시 문화조차에도 못 미치는 야만의 민 낯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기독교 정신에 근간한 작품들로써 세계의 대문호로 칭송받는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를 자랑하는 문화라고 하지만, 그들은 바누아투의 풍속을 결코 미개하다고 부를 수 없을 것입니다.
‘복음서의 정수(精髓)’라고도 불리는 ‘산상수훈’에서 예수님께서는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고 선포하셨습니다(마태복음5:9).
여기서 ‘하나님의 아들’이라 함은 예수님 자신의 지위를 일컫는 것인데,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가 바로 화평하게 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범죄 한 인간 사이를 화목하게 하시고, 타락한 인간 사이에서 일어나는 온갖 종류의 불화와 증오의 장벽을 허무 시기 위해서였습니다(에베소서 2:14). 즉, 화목하게 하는 삶을 사는 이들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가장 중요한 그 목적을 몸소 구현하며 사는 것이므로, 마치 예수님과 같다는 존귀함을 받을 것이라는 뜻입니다(마태복음 25:40).
졸필을 잠시 읽으시는 동안 평화와 화합을 추구하는 바누아투인들의 풍속과 우크라이나 전쟁의 참상, 그리고 화평케 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하면서 다시 한번 우리 안에 잃어버린 평화의 가치에 대해 자각하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싸우지 말고 사이좋게 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