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TV에서 본 흥미로운 실험이 생각납니다. 사람은 시각보다는 청각에 더 예민하게 반응한다는 내용을 증명하는 실험이었습니다.
두 개의 비디오방을 준비한 다음 각각 공포영화를 상영해 주고 실험 참여자들이 얼마나 공포 반응을 보이는지 실험한 것입니다.
한쪽 방에는 소리는 나오지 않고 영상만 나오는 공포영화를 상영해 주고, 반대편 방에서는 영상은 없이 괴기스러운 소리와 비명만 들리도록 상영해 주었습니다.
결과는…? 영화를 “본” 사람들 보다 “들은” 사람들이 훨씬 더 공포감을 느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 사실은 아기들을 보면 더 잘 알 수 있습니다. 부모가 무서운 표정 한 번만 지어도 변기통의 물에 손을 담그며 장난치는 것을 멈추지 않다가, 분위기 깔린 중저음으로 자기 이름을 부르는 저의 목소리를 들으면 딱 멈춥니다.
엄마가 불러주는 할머니표 자장가 (옛날 할머니들이 잘 부르시던 스타일의 자장가)를 들으면 곧 눈꺼풀은 졸음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 감기기도 합니다.
말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지만 엄마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에 아기는 반응하는 것이지요. 막내아들의 어릴 적 버릇이 있었습니다. 품에 안고 제가 이야기할 때면 제 입을 빤히 쳐다보다가 자기 손가락을 가져다가 저의 입안에 넣는 것입니다.
아기들이 세상과 커뮤니케이션하는 도구 중에 하나가 바로 소리입니다.
당연한 이치로, 시각 장애우들 역시 소리에 민감합니다. 어느 시각장애인 목사님께서 설교 중에 하신 말씀이 생각납니다.
시각 장애우들이 길을 가다가 가장 무서워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높은 턱? 푹 파인 웅덩이? 돌부리? 그런 것들은 예기치 못한 장애물들이라 생각보다 그리 공포감이 심하지 않다고 합니다.
그보다 더 그들이 무서워하는 것은 바로 소음입니다. 부족한 시력을 청각과 촉각으로 대체하는 시각 장애우들은 도심을 걸을 때면 거리 사이를 흐르는 공기의 흐름으로도 그곳이 사거리인지, 삼거리인지 막힌 길인지를 분간할 정도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민감한 청각이 마비될 때가 있습니다. 바로, 요란한 굉음을 내는 지하철 공사장 옆을 지날 때나 자동차들이 경적을 울릴 때입니다.
순간, 주변의 소리를 분간하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랍니다. 마치 정상인이 길을 가다가 눈앞이 캄캄해지는 어지럼증을 만나면 순간 당황하듯이 시각 장애우들은 커다란 소음을 만나면 패닉 상태에 빠진다고 합니다. 시각 장애우들이 칠흑 같은 흑암 속에서도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도구가 바로 소리입니다.
이와 비슷하게 우리의 영혼도 소리에 민감한 것 같습니다. 미국의 소설가, 에드가 알렌 포우의 “고자질하는 양심(The Tell-Tale Heart)”이라는 단편소설이 있습니다. 주인공이 가까이 지내던 노인을 죽인 후, 자신의 모습을 분석하는 독백 형식으로 쓰인 짧은 소설입니다.
아주 친절한 한 늙은이와 한 집에서 살던 주인공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주인공은 무슨 광기가 쓰였는지 노인의 창백한 눈빛이 맘에 들지 않는다는 말도 안 되는 이유로 그 노인을 죽이기로 결심합니다. 수차례 노인의 방을 침입하는 연습을 하고서는 마침내 그를 죽입니다. 그러고는 죽은 노인의 시체를 마루 밑에 숨겨 놓았습니다.
잠시 후 괴성을 듣고 경찰이 들이닥쳤습니다. 주인공은 이미 노인의 시체를 마루 밑에 숨긴지라 가벼운 마음으로 경찰을 대합니다. 그러고는 자기가 악몽을 꾸다가 괴성을 질렀다고 거짓말을 합니다. 노인은 지금 타지방에 여행 중이라고 둘러대고는 천연덕스럽게 경찰을 노인의 방으로 안내합니다.
경찰을 완벽하게 속이기 위해 주인공은 노인의 방으로 의자까지 갖고 와서 경찰에게 앉을 것을 권합니다.
그도 노인의 시체가 숨겨진 마루 위에 의자를 놓고 앉았습니다. 경찰은 더 이상 의심하지 않고, 의자에 앉아 한담을 시작합니다.
그런데, 경찰이 관심을 다른 데로 돌리게 되었을 때, 이상하게도 주인공의 심장은 뛰기 시작합니다.
얼굴은 점점 창백해집니다. 애써 침착하게 대화에 참여하려 듯 보이려 애를 쓰지만, 오히려 그의 귀에는 이상한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합니다. 낮고 둔하고 빠른 소리입니다. 그는 숨을 죽이고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데, 정작 경찰은 듣지 못하는 듯합니다.
소리는 점점 커집니다. 주인공은 행여 경찰이 이 소리를 들을까 봐 더 크게 말합니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더 큰 소리가 들립니다.
“왜 이 경찰들은 가지 않는 거야?” 초조해집니다. 주인공은 일어나서 안절부절하며 노인이 숨겨진 마루 위를 터벅터벅 걷습니다. 소리가 더 크게 들려옵니다. “아니 이 소리를 저들은 듣지 못하나?” “아니 이젠 들었을 거야. 그들은 다 알고 있어. 그들은 모르는 척하며 나를 떠보고 있어.” “더 이상 그들의 조롱을 못 참겠어. 소리라도 지르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아!” 드디어 주인공은 입을 열어 소리를 지릅니다. “내가 죽였소! 마루를 뜯어보시오! 이 소리는 노인의 심장소리란 말이요!”
여기에서 소설은 끝납니다. 주인공이 들었던 그 이상한 소리는 바로, 자기 양심의 소리였던 것입니다.
양심의 소리를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주인공은 자신의 죄를 토로하고 만 것이죠.
이렇듯 우리 영혼도 소리에 민감한 것 같습니다. 오늘 하루만큼은 눈을 좀 더 자주 지그이 감고 내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는 건 어떨까요?
좋은 설교들, 찬양들도 많지만, 내 안에서 말씀하시는 성령의 소리,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고 그 소리에 정직하게 대답할 수 있다면 우리의 신앙은 한걸음 더 성장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