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리함을 찾는 현대인의 모습들이 신앙생할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나타났다. 예전에는 주일성수를 목숨처럼 생각하며 주일을 지켰다. 그러나 오늘날 자신의 편리를 먼저 생각하며 ‘꼭 교회를 가야만 예배가 되느냐, 하나님은 어디나 계시지 않는가?’라는 이상한 사상들을 주장한다. 예배가 무엇인가? 예배는 하나님을 사랑하니까 드려지는 것이다. 결코 시간 때우기가 될 수 없다. 어느 주일, 예배가 짧게 끝나고, 연합행사를 위해 이동을 하는 일이 있었다. 성도들의 반응에 놀랐다. ‘예배가 깔끔해서 좋았고, 무엇보다 주일 시간을 여유롭게 사용하게 되어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안 하면 찜찜할 수 있는 주일예배를 잘 해치웠다는 즐거움이 배인 듯이 말하는 것에 놀랐다. 목회자로서 하나님 앞에 뭔가 실수한 것은 찜찜한 마음이 들었다.
실패한 예배자 양성
몸이 교회로 오지 않는 편리한 예배를 드리겠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 ‘꼭 내가 몸을 움직여 교회에 갈 필요가 있겠느냐? 그냥 집에서 편하게 인터넷으로 말씀을 듣고, 필요하면 헌금은 온라인으로 보내면 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이 많아지다 보니 영혼을 변화시킬 교회가 오히려 시대를 따라 변하는 것을 본다. 죄 많은 인생이 교회 앞에 나아와 말씀과 성령 안에서 변화되어야 하는데, 거꾸로 교회가 사람들의 편리함을 위해 힘쓰고 애쓰는 모습이 부흥(?)과 직결된다는 사실에 놀라게 된다.
너무 사람이 모이지 않으니 예배당에서 유행가 가수의 쇼가 펼쳐진다. 한두 곡 유행가를 부르는 것은 전도를 위해서는 소소한 것으로 치부한다. 소비자로 전락한 예배자를 우대하기 위함이다. 그러다 보니 술과 재떨이를 두고 예배하는 교회도 생길 지경이다. 실제로, 서울의 어느 대형교회는 이미 초신자를 편안하게 해주겠다는 명목으로 교회당 한쪽 공간에 재떨이를 두었다고 한다. 교회가 스스로 그 존귀한 권위를 세상바닥에 팽개쳐 버리는 것과 다를 바 없는 나쁜 것이다.
교회는 서비스업이 아님
신앙은 사람의 편한 것에 교회가 맞추어 주면서 행하는 서비스업이 아님을 생각해야 한다. 신앙생활, 예배생활은 편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편하기를 포기하고, 불편함을 온전히 받아들일 때 제대로 예수를 믿을 수 있다. 예배는 시작부터 마치기까지, 그리스도의 보혈과 그 십자가를 붙잡고 회개하며 마음이 축축해서 드려지는 시간이어야 한다. 예배를 통해, 죄성을 거스르며 성령과 말씀 앞에 자신의 영혼을 깨끗하게 조명하며, 철저히 말씀에 맞추어 영혼의 불순물을 씻어내고, 굳은 마음이 부드러운 마음으로 변화되는, 영혼이 수술받는 구별된 시간이 예배이다. 그런 예배가 어떻게 편하고 좋을 수만 있겠는가?
때로는 가슴을 찢는 통절한 회개가 나타나고, 때로는 가슴 터지게 부르는 찬양이 밤을 지새우게 만드는 그런 예배가 즐거움과 기쁨을 주는 예배에 앞선 본질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불편할지라도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예배에 대한 거룩한 구별이 온전히 있어야 한다. 이것이 성도가 누리는 축복이다. 그래서 자연히 구별된 복장도 필요하다. 또 댄스홀에 왔는지, 예배당에 왔는지 구별되지 않거나,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것인지 어떤지 모를 자세로는 도저히 구별된 예배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소비자 중심주의 거부
교회는 예배 공동체이다. 교회의 존재 목적의 가장 첫 번째가 예배다. 신앙의 선배들은 예배가 있는 곳에 교회가 있다고 했다. 예배가 없는 교회는 교회가 아니고, 예배를 잘못 드리는 교회는 좋은 교회가 아니다. 좋은 교회는 예배를 잘 드리는 교회이고 좋은 그리스도인은 예배를 잘 드리는 성도다. 소비자 중심주의 태도를 없애야 한다. 마치 물건을 자신의 기호에 맞게 사듯이, 자기만족과 기쁨과 편안함이 목적인 소비자 중심의 소비주의가 되면 안 된다. 오직 하나님을 높이고 그분에게 영광을 올려드림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그 예배를 받으신 하나님이 하늘로부터 하늘 문을 열고 주시는 은혜가 우리가 누릴 만족과 기쁨이다.
예전에는 교회에 가는 일, 교회에서 봉사하는 일 때문에 그렇게 부부싸움을 하고 자식과 싸움이 되었다. 그래서 신앙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아픔의 시간도 필요했고, 하나님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데 이러한 고통을 사용하였는데, 지금은 하나님이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를 기다리며 기도할 틈도 없이 너무나 잘 알아서 해결하고 타협하더라는 것이다. 스스로 알아서 적당히 타협하고 이해하니, 하나님이 개입하실 틈도 없고 더불어 신앙의 아름다운 간증도 없어지더라는 것이다.
악한 세대의 참된 믿음
이 악한 세대는 참으로 믿음을 가지고 살려는 우리에게 요구한다. 코로나 시대를 지나면서 더욱 강력하게 요구할 것이다. ‘편하게 믿어라. 뭘 그렇게 별나게 신앙생활을 하느냐고 말한다. 적당히 섞여 살아라’라고 말한다.
‘다양성을 인정해야 한다.’라고 말한다. 말씀대로 지키자고 하면 율법적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내면 깊숙한 곳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신앙과 멀어지게 하는 바로의 소리가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신앙은 편리주의로 하는 것이 아니다. 예배는 자기 자신이 주인되어 드림이 아니라, 주님 앞에 겸손히 부복하는 심령으로 자신을 진설병처럼 곱게 곱게 부수어서 고운 가루의 모습으로 주님 손에 드려지는 것이다. 여기에 예배의 성공이 있고, 예배가 성공된 그곳에 회복과 축복의 열매가 나타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