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저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기를 마치 아버지가 그 기뻐하는 아들을 징계함같이 하시느니라”(잠3:12)
본 절 서두에 “대저”로 시작하고 있는데, 사전적 의미는 ‘무릇’, ‘대체로 보아서’로 되어 있습니다. 무슨 의미를 전달하는지 정확하게 알 수가 없는 것 같습니다. 히브리어 원문에는 ‘왜냐하면’(because), 이유와 원인을 나타내는 ‘키’(כי)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는 11절에서 하나님의 징계를 경히 여기지 말고 꾸지람을 싫어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랑하시기 때문에 징계하신다는 것입니다. 마치 육신의 아버지가 자신의 아들을 꾸짖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자신이 사랑하는 자를 꾸짖고 책망한다는 것입니다.
11절에 나오는 ‘징계’는 단련시키기 위한 훈련의 목적을 둔 단어이지만, 여기에서 ‘징계’로 번역 되어 있는 ‘야카흐’(יכח)는 잘못된 것을 바로잡기 위하여 책망하고 꾸짖는 행동을 가리킵니다. 훈계보다 더 강도가 크게 책망하고 꾸짖고 야단을 치는 모습입니다.
사실 아무리 자식이라 할지라도 자신의 잘못을 지적하면서 책망하면 기분이 좋을 리가 없고 짜증나고 신경질이 날만 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자식들은 분명히 기억할 것은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나를 기뻐하기 때문에 더 훌륭한 자식이 되라고, 더욱 멋들어진 신앙인으로 성장하라는 마음에서 주어진 책망이라는 사실입니다.
다시 한 번 우리 한국교회를 돌아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코로나 방망이로 채찍질하는 이유를 깨달아야만 합니다.
교회론 정립에 문제가 있어 바른 목회, 바른 사역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 ‘에클레시아’(ἐκκλησία)는 건물로서의 교회당, 또는 교회의 구조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특별한 목적을 위하여 부르심을 받은 무리’로서의 인격적 공동체를 가리킨다는 사실입니다. 즉 건물이 아니라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건물을 확장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인 신자들 개인 개인을 성장시키고 강화시켜야만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신자의 신앙과 인격, 사역적 삶을 훈련하고 강화시키기 보다 건물을 강화시키는 일에 시간과 물질을 너무나 많이 투자한 것 같습니다.
가톨릭교회의 교회론의 잘못을 지적하며 종교개혁을 했었는데, 우리도 다시 가톨릭교회와 같은 교회론에 빠진 것입니다.
이제라도 코로나의 징계, 꾸지람을 깨닫고 회개하고 정비했으면 합니다.
한국교회를 사랑하여서 이 징계를 주셨다는 마음 자세로 깨닫고 반성하고 회개의 시간을 가졌으면 합니다.
“주여! 우리를 사랑하여 선교 120년 만에 가장 큰 종교 단체로 성장시켜주었지만 우리는 그 은총을 망각하였고, 우리의 역할, 우리의 과제, 우리의 사명을 감당하지 못했습니다. 용서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