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어린 시절부터 독실한 카톨릭 신자이신 어머니로 인해 성당에서 자주 생활하곤 했습니다. 성장하면서 자주 경험해 온 것이 있습니다.
당시에 교회를 열심히 섬기시던 주위 친구들의 부모님들께서 저에게 물어보십니다. “상준아! 너 교회 다니니?”, 주저함 없이 대답했습니다. “아니요. 저는 성당 다녀요.”라고 대답하면, 그 부모님들께서는 함께 있었던 친구들에게는 듣기 부담스럽고 귀찮을 정도로 반복하셨던 “교회 다녀라.” 또는 “이번 주 아무개랑 함께 교회에 나올래?” 등등의 말씀을 저에게만큼은 안 하셨습니다.
저는 스스로 성당에 다닌다는 것에 큰 만족감과 나 자신이 성당이라는 단어 하나에 매우 큰 보호를 받는다는 느낌이 있었습니다.
더 나아가 지하철이나 공공장소에서 무섭고, 보기 사납게 쓰인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의 푯말을 들고 서 계시던 분들을 보면 좋지 않은 시선과 혐오감을 느끼며 지나쳐 가곤 했었습니다.
처음 미국에 유학을 와서도 말이 통하지 않는 미국 성당에 출석하여 몇 주 동안 임신한 와이프를 집에 놔둔 채 혼자 미사를 드리러 가곤 했었습니다.
당시 제가 살던 지역에는 유학생 전도에 열과 성을 아끼지 않는 여자 집사님이 계셨습니다. 저희 집에도 예외 없이 직접 담근 김치 또는 배추 등을 들고 집 현관을 노크하곤 하셨습니다.
저도 변함없이 그 집사님에게 반응하였습니다. “저는 성당 다녀요. 저희 배추, 김치 필요 없어요. 저희가 필요한 것 스스로 할 수 있으니, 다른 유학생들 주세요.”라며 매우 차갑게 돌려보내곤 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린 나이에 혼자 유학 와서 카이로프랙틱 공부를 하며, 저와 제 와이프에게 항상 깍듯이 대하는 친한 동생이 저에게 묻습니다. “상준이 형님! 한국에서 저도 성당에 다녔는데, 얼마 전부터 여자 집사님 통해서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어요. 교회 가니까 밥도 많이 주고, 정말 잘 해주세요. 형님도 형수님 모시고 함께 교회 나가봐요”라며 수차례 말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가까이 지내는 동생의 권유에 못 이기고, 교회에 발을 들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첫 임신과 가족에 대한 그리움, 언어 소통의 부담으로 밖에서 사람들과의 만남이 제한적이었던 와이프에게 교회에 나가서 사람들을 만날 것을 권유하기 시작했고, 이후 베이비 샤워 등등의 아낌없는 사랑과 관심을 받으며, 와이프와 함께 교회 생활에 차츰 적응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던 저에게 제 인생 처음 겪는 시련과 고통의 시간이 찾아왔습니다. 제 몸에는 주님과 서약한 스티그마가 있습니다.
미국에 유학 올 당시 한일 월드컵의 열기로 대한민국의 국민들에게 자극을 주었던 단어가 ‘나의 경쟁력이 국가의 경쟁력’이었습니다. 미국 유학생으로, 양가 부모님과 국가에 효도하고 충성하는 것은 공부를 열심히 해서 졸업 후 훌륭한 의사가 되어 보답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화장실에 가는 게 아까워서 물을 안 마시며 16-18시간을 의자에 앉아 공부하기도 하고, 한 학기에 43 학점을 신청(정상적인 학생이 아님)하여 수업을 듣기도 하고, 침대에서 편하게 잠을 자면 알람 종소리에 못 일어날까 싶어서 자켓을 입고 카펫 위에서 검도 죽도를 옆에 두고 잠을 청하며, 일어나면 바로 정신을 차리기 위해서 죽도로 후리기 500-1,000번을 동작한 뒤 책상에 앉아 공부하곤 했었습니다.
어느 날부터 몸에 통증을 느끼기 시작했고, 몸에 딱딱한 뭔가가 몇 군데에서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커지고, 찬양하는데 아파서 마이크 들고 서 있기가 부담스러웠고, 차를 운전하는데도 통증이 있었습니다. 결국에는 종합병원에서의 진찰과 진료를 위해 한국으로 귀국하였습니다. 진단명은 ‘Neurofibroma(신경섬유종), Kidney stone(신장결석).”
2007년 12월 차가운 수술대에 올라가는 동안, 그동안의 과정들을 회상하며, 주님께 기도하였습니다. 그동안 최선을 다해서 살았는데, 너무 일찍, 그리고 이렇게 문제가 발생하여 아무것도 못하게 되면 어떻게 되느냐고…그리고 처음으로 주님께 “주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겠습니다. 주님! 도와주세요.”라고 기도합니다.
그 이후부터 믿음의 짧은 여정이었지만, 너무 많은 일들을 경험하게 하시는 주님을 통해서 예수님만이 진정으로 내 삶의 구원자이시며, 길이요, 진리요, 생명임을 재차 확인하고 고백하는 그리스도 신앙인으로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2009년 7월 마지막 주 수요일 새벽, 달라스 이주 후 첫 새벽 예배에 참석하기 전 1-2시간 동안 주님께서는 저에게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부르심을 주셨습니다. 제가 달라스로 오게 된 이유와 목적을 말씀해 주시며, 주님께서 하실 일에 순종하는 것이었습니다.
‘세미한 카이로프랙틱 클리닉’을 통한 일터 사역입니다.
세계인, 미국인, 한국인에게 하나님께서 저에게 주신 카이로프랙틱 달란트를 통해 하나님의 능력과 임재를 나타내고, 오직 예수님께 영광을 올려드리며,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카이로프랙틱 비즈니스가 아닌 세미한 카이로프랙틱 클리닉의 비즈니스 현장에 하나님의 나라가 선포되고 확장되어 이곳을 주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광야와 같은 이 믿음의 여정을 통해서 주님을 조금 더 알아가게 되었고, 주님을 조금 더 사랑하게 되었으며, 주님을 조금 더 신뢰하며 경외하게 되었습니다.
14년이 지난 시간을 돌아보니, 그 부르심은 나에게 허락하신 은혜와 사랑과 축복으로의 시간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