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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4월 18,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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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삼석 목사] 삼위일체 신론과 바른 창조론

방삼석 목사
달라스 뉴라이프 선교교회 담임

오늘날 인류는 심각한 생태적 위기 앞에 서 있다. 어둡고 침울한 종말에 관한 소설과 영화들이 우리의 불운한 미래를 운명론으로 받아들이게 할 만큼 현실은 심각하다. 이런 생태계의 위기를 초래한 원인이 기독교 창조론이라고 비판하는 이들도 있다. 하나님은 창조의 마지막 날에 자신을 닮은 인간을 지으시고, 모든 피조 세계를 정복하고 다스리라 명하신다(창1:28). 이 말씀이 근대 이후 인간이 자연을 풍요로운 삶을 위해 개발하고 정복해야 하는 대상으로 여기도록 하는 인간 중심주의 세계관의 동력이 되어 온 것은 사실이다(프랜시스 베이컨, Novum Organum, 1620). 그러나, 생태위기의 궁극적 원인은 기독교 창조론이 아니라, 인간의 주체하지 못한 탐욕에 기인한다. 성경의 창조기사는 오히려 그 탐욕에 제동을 걸고, 그 탐욕의 절정에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죄악된 욕망이 도사리고 있음을 고발하고 있다(창3:5). 사탄이 에덴에서 사람을 유혹하는 자리에는 신 존재에 대한 망령된 왜곡이 있었다(창3:3-5).

전능하신 창조주의 불완전한 작품?
2세기 중엽에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나, 사업으로 크게 성공한 마르시온은 교회에 자신의 모든 재산을 헌납할 정도로 헌신적이었다. 그러나, 불완전한 세계를 보면서 마르시온은 선하고 완전한 신은 악한 물질 세계를 지을 수 없기 때문에, 자연 세계는 저급한 대장장이의 작품이라고 믿었다. 영국의 유명한 철학자인 버트란트 러셀도 우리가 경험하는 삼라만상의 결함들 때문에 전지 전능한 신의 창조를 믿을 수 없다고 하였다(Why I am not a Christian?). 그에게 이 세상은 그저 그렇게, 우연히 존재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대한 오해 풀기!
우리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대한 오해가 있다. 독일 보쿰 대학의 크리스챤 링크 교수는 “창조와 창조책임”이라는 강연(기독교 학술원 주최, 2016)에서 창세기 1장이 묘사하는 인간 존재의 중요한 실존은 한계를 인정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이 하나님이신 것을 자기에게 유익한 것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우는 것으로 여기시는 분이시다(빌2:6). 하나님의 ‘전능’에 대한 오해를 풀어야 한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의 ‘전능’은 히브리어 ‘El Shaddai’(엘샤다이)를 그리스어 ‘pantokrator’(판토크라토르)로 옮기고, 그것을 라틴어로 ‘Omnipotent’(옴니포텐트)로 번역한 결과이다. 다시, 번역을 거슬러 가 보자. 라틴어 ‘omnipotent’ 는 ‘almighty’, 모든 능력을 의미한다. 헬라어 ‘pantokrator’는 모든 것을 다스린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히브리어 ‘El Shaddai’에 함의된 성경 역사적 의미는 그 분의 자유하심으로 욥과 더불어 고난의 길을 기꺼이 갈 수 있는 하나님을 가리킨다. 욥기의 전능하신 하나님은 하나님을 향한 원망과 탄식가운데 직접 대면하여 대화하실 수 있는 가까이 계신 하나님이시다. 그 하나님의 전능성을 가장 잘 표현하는 것이 바로 십자가이다. 고통 당하신 하나님, 예수의 죽음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보게 된다. “하나님의 전능성은 타자를 위해 고난을 받을 수 있을 만큼 무능에 대한 능력이 있음을 뜻한다.” (김용성, 하나님 이성의 법정에 서다, 262) 그 하나님은 성령안에서 자연 만물의 탄식에 참여하신다(롬8:26).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존재 이유를 삼위일체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관련하여 새롭게 생각해야만 한다.

우리가 존재하는 이유
판넨베르크는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말할 때, 무엇을 말하는지를 아는 사람은 세계와 인간의 현실성에 대해 생각할 때, 하나님을 그 근원으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역으로 말한다면,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해 생각할 때 모든 현실의 총체성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이라는 생각을 동시에 하지 않을 수 없다.”(판넨베르크, 철학과 신학I). 창조 이전에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거룩하고 흠이 없는 존재들로 선택하신 하나님은(엡1:4-5)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나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신다(엡1:10). 이와 같이 세상의 창조와 우리의 존재 이유도 그리스도 없이 설명할 수 없다. 오직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의 의도가 아니면 설명할 길이 없다는 말이다. 그러나, C.S. 루이스가 말한대로 그 사랑은 필요에 의한 사랑이 아니라 주는 사랑이다. 하나님은 고독한 일자가 아니기 때문에, 그 사랑도 자신을 내어 주고 나누어 주시는 삼위일체 하나님 자신의 존재적 본성에서 나오는 사랑이다. 하나님은 바로 그 사랑 안에서 그 사랑 때문에 이 세상을 창조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창조와 창조 세계의 탄식할 만한 불완전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늘의 것과 땅의 것이 하나되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원하신 작정 안에서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사람들이 신을 부정하는 이유는 신이 우리의 그림에서 사라지는 순간 이 세상을 우리가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자유가 생기기 때문이다. 그런 무신론적 방종주의가 기독교 유일신론적 창조론의 한 편에도 기웃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으로 말미암는 이 세상은 결국 자기를 내어주고 나누어 주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의 원리 안에서만 하늘과 땅의 온전한 일치를 이루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창조계의 제사장으로 거룩한 기름부음을 받았다면, 우리들 자신의 수염과 옷깃 뿐만 아니라, 우리가 서 있는 오염된 땅의 자리에도 자기비움의 거룩한 기름이 흘러내려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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