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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1월 17,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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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실 생활칼럼] 늦게 피는 꽃

박영실

  이른 봄에 베란다 정원에 야채를 골고루 심었다. 씨를 뿌린 것도 있고 모종을 구입해서 심은 것도 있었다. 씨를 뿌린 것들은 어느새 무거운 겨울 외투를 벗고 파릇한 기지개를 켜고 꽃이 피어 열매를 맺었다. 토마토 나무가 볼그레한 얼굴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아그데아그데 열린 열매의 무게에 균형을 잃은 듯했다. 달보드레하게 열린 까마중이 그 옆에서 미소를 지었다.

  정원 안에 있는 많은 식물 중에 유난히 내 시선이 흘러간 나무가 있었다. 이른 봄에 모종을 사다 심고 몇 달 동안 부지런히 물을 주고 정성을 들인 파프리카 나무였다. 그 나무는 시간이 지나도 어떠한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다. 성장을 멈춘 듯이 키도 자라지 않고 꽃도 피지 않아 아픈 손가락같이 마음이 쓰였다.

  파프리카 나무를 볼 때마다 왜 자라지 않고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지 궁금했다. 어느 날, 그 나무를 더 키울 의미가 없을 듯해 화분을 정리하려고 했다. 그 순간 파프리카 나무들이 조금만 더 기다려주면 안 되겠냐고 말하는 듯했다. 손에 들고 있던 화분을 바닥에 내려놓고 허리를 폈다. 화분 안에 있던 그 나무들은 그제야 안심을 하는 것 같았다. 그런 와중에 남편과 3주 동안 해외 선교 일정으로 출국했다.

  선교를 마치고 집에 돌아왔다. 캘리포니아 한여름 땡볕을 견딜 수 없었는지 식물들 대부분이 건초 상태였다. 상추와 깻잎, 쑥갓, 고수는 모두 말라서 모습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오이와 고추, 토마토는 수분을 공급받지 못해 열매를 맺지 못했다. 하지만 남편과 내가 출국 전보다 키도 더 자라고 끝까지 생존한 나무가 있었다. 내가 화분째 버리려고 했던 파프리카 나무였다. 세 그루 모두 튼실하게 자라 예쁘고 먹음직한 열매를 맺었다.

  마치 나를 향해 말을 건네는 것만 같았다. “주인이 우리를 버리려고 했는데 이렇게 잘 자라서 정원을 지키고 있잖아.” 사랑스럽고 탐스러운 파프리카를 손에 넣으며 따는 느낌이 달랐다. 서로 대면하지 못할 수 있었는데 조금 더 기다려 준 덕분에 열매를 맛볼 수 있었다. 땡볕을 견디지 못하고 정원에서 사라진 식물들 대신 정원을 끝까지 지켜준 고마운 친구들이다.

  파프리카 나무가 자라지 않는다고 성급하게 결론을 내리고 버리려고 했다. 식물도 기다려주니 때가 되어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사람은 어떨까! 비록 더딜지라도 제때에 맞게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고 제 삶의 영역에서 그 몫을 감당하며 살아가면 그 은혜로 족한 것이 아닐까! 열매의 유무와 무관하게 존재 자체로 소중하다.

  얼마 전에 화분에 있는 파프리카 나무를 다시 들여다보았다. 그곳에서 열매가 계속 열리는 이유가 궁금했다. 열매를 수확하고 화분을 손질하다 우연히 화분과 나무가 분리되었다. 그 순간 그곳에서 예상하지 못한 장면을 목도했다. 다른 식물들과 다르게 화분 안에 있는 수많은 잔뿌리가 화분 속을 가득 채운 풍경이었다. 뿌리와 흙이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어 흙이 떨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파프리카 나무가 오랫동안 열매를 맺을 수 있었던 원인은 그동안 뿌리를 내리는 시간이 다른 나무에 비해 길었던 거였다. 다른 나무들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동안 그 나무는 계속 잔뿌리를 내리는 작업을 했다. 어떠한 폭풍과 가뭄에도 견디고 생존할 수 있는 면역력과 회복 탄력성을 키운 듯했다.

  다른 식물들이 무대를 떠나 이미 퇴장한 후에도 파프리카 나무는 홀로 정원을 지키며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었다. 뿌리를 견고하게 내리는 시간이 있었기에 그 시간조차도 헛되지 않았을 터이다. 그 내공으로 침묵하며 홀로 남아 열매를 맺을 수 있었으리라.주위의 어떠한 소리나 반응에도 요동하지 않고 잔뿌리를 내리는 작업을 반년 이상 했던 거였다. 정원에서 자라고 있는 식물들을 마주하며 잠잠히 인내하며 침묵하는 법을 배웠다. 늦게 피는 꽃이 건네주는 소소한 일상을 경험했다. 내 시선이 오래도록 그 나무에 머물렀다. 그 나무를 키우며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느껴지는 듯했다.

  정원에 있는 식물들을 마주하며 많은 상념에 잠긴다. 삶의 변곡점 지나오는 동안 모든 것이 침묵하는 듯한 시간을 지날 때도, 빛 한 줌 없는 칠흑 같은 터널을 통과할 때도, 봄이 사라진 듯한 긴 겨울을 지나온 때도 있었다.

  파프리카 나무 몇 그루에서 삶의 지혜를 길어 올린다. 정원을 지키는 것은 거목이나 화려한 꽃이 아니다. 일찍 핀다고 자만할 일도, 늦게 핀다고 낙심할 일도 아니다. 비록 늦게 만개해도 자기 십자가를 지고 묵묵히 자기 삶의 무게를 감당하며 자리를 지키는 꽃이 정원을 지킨다. 거대한 뿌리가 아니라 잔뿌리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그 나무를 더욱 견고하게 지탱하고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완전하시고 실수가 없으신 신실하신 분이시다. 비록 더딜지라도 하나님의 주권 안에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때를 따라 섭리하시고 아버지의 뜻을 성취하시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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