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1 F
Dallas
금요일, 11월 7, 2025
spot_img

[박영실 사모] 이삿짐

미주 중앙일보 중앙신인문학상 수필부문 당선으로 수필에 등단했다. 시인, 수필가, 동화 작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시, 수필, 동화, 소설 등을 창작하고 있다. 목회하는 남편과 동역하고 있으며 프리랜서 강사로 활동하고 있다. 현재 미국 캘리포니아 오렌지 카운티에 거주하고 있다.

미니멀라이프를 선호하는 사람들이 증가하는 추세다. 최소한의 짐으로만 살아야겠다는 다부진 결심이 아니던가. 오랫동안 삶의 흔적이 담긴 집을 떠나 새로운 곳으로 터전을 이주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간이역에 머물면서도 한 번 이사하려면 신중하게 집을 구하는데 삶을 마무리하고 종착역으로 이사할 때의 모습은 어떨까. 인간은 요람에서 무덤까지 희로애락의 이삿짐을 짊어지고 산다. 그것은 남녀노소, 모든 민족, 모든 세대에 공통으로 공평하게 주어진 것이다. 그럼에도 영원한 하늘 본향 집을 사모하며 이사를 준비한다면 삶이 달라지지 않을까. 마라토너는 목표 지점이 정해지면 출발부터 호흡과 보폭이 다를 수밖에 없다.

우리는 순례자의 삶을 살다 언젠가 하나님 앞에 설 때가 있다. 이곳에서의 모든 여정을 뒤로하고 본향으로 이사할 때가 오면 무엇을 취하고 버릴 수 있을까. 이 땅에서는 이사할 때마다 이삿짐을 챙겨야 하지만 마지막 이삿짐은 챙길 필요가 없다. 주님 품으로 갈 때는 아무것도 취할 수 없다. 여행할 때마다 가방을 여러 개 준비하는 지인들이 있는데 가져간 짐을 다 쓰지 못하고 온단다. 필자는 여행할 때 배낭 하나면 족하다. 최소한의 짐으로 가볍게 다녀야 간편하고 좋다. 집도 이사할 것을 생각해서 짐을 최대한 가볍고 간편하게 정리하는 게 좋다. 필자는 집안이 정돈되어 있지 않으면 아무리 분주해도 청소부터 한다. 주변 정돈이 잘 되어 있어야 할 일을 할 수 있다. 정리를 하고 나면 생각이 맑아진다.

얼마 전에 가까운 지인 부부가 선교지로 갔다. 짐을 정리하는데 두 달 이상이 소요되었단다. 그때 생각한 게 있는데 언제든지 떠날 준비를 하며 최소한의 짐만 남기며 살기로 했단다. 아끼던 물건, 가족들의 삶이 담긴 흔적과 추억을 정리하고 기증했다고 한다. 최근 50대 이상 중년층이 자신의 짐을 서서히 정리하며 산다는 뉴스를 접했다. 한 치 앞을 예측하기 어려운 게 우리 삶인데 집을 나갈 때 항상 정돈하고 나간다는 사람도 있었다.

물건은 물건 그 이상의 가치를 담고 있다. 일본의 정리 전문가 곤도 마리에는 “누군가의 물건은 그가 그동안 어떤 선택을 해 왔는지 정확히 말해줍니다. 정리는 나 자신과 조용히 마주하는 일입니다.”라고 했다. 정리는 정리 자체의 문제가 아니다. 그 사람의 삶의 일부가 아니라 내면세계의 상태와 삶의 전부를 보여준다.
나그네와 행인 같은 광야 여정을 마치고 본향으로 돌아갈 때 가벼운 마음으로 떠나야 하리라. 그렇지 않으면 짐을 정리하면서 버리지 못한 것들에 대한 아쉬움과 회한으로 채워질 테다. 노마드의 삶이 몸에 배어야 하나님께서 가라 하시면 가고 멈추라 하시면 멈출 수 있는 순종의 삶을 살 수 있다. 광야를 지나는 동안 우리가 취할 수 있는 게 없다. 언제든 내려놓고 버릴 수 있어야 이삿짐을 정리하는 게 가능하다.

미처 정리하지 못하고 가져온 것들, 꼭 필요한데 잃어버리고 온 것들에 대한 미련으로 한동안 가슴앓이를 한 적이 있다. 필자에게 하나밖에 없는 중요한 물건인데 이사할 때 이삿짐센터 직원들이 실수로 버린 거였다. 오랫동안 마음이 무거웠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마음이 가벼워지기 시작했다. 물론 아쉬움은 남았지만 지나간 일에 대해 집착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 일을 묵상하고 있으면 나를 압도하고 지배할 것 같아 잊기로 했다.

그 일을 경험하면서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잊어버림의 가치, 잊어버렸는데도 충만해지는 어떤 기분! 바람을 맞으며 다듬어진 상흔은 필자에게 소중한 선물로 찾아왔다. 스트레스 조절 능력인 자아 탄력성이 생긴 듯했다. 자아 근육이 어느 정도 단련이 되어 있었던 거였다. 무방비 상태로 받는 외부의 어떠한 공격에도 유연성이 생겨 충격을 흡수하고 넘길 수 있는 너그러움이 덤으로 생겼다.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물건은 잃어버렸을지라도 더 가치 있는 것을 선물로 받은 셈이다. 가치 있고 소중한 것조차도 내려놓을 수 있는 고즈넉한 마음을 이삿짐에 쌓아 온 거였다.

삶의 변곡점을 마주할 때마다 희로애락의 이삿짐을 풀지 못하고 무게가 더 가중된 것은 아닐까. 언젠가 삶을 마무리할 때를 위해 지금부터 불필요한 짐을 버리는 게 필요하다. 이삿짐 정리하는 법을 잘 배워야 가볍게 이사할 수 있지 않을까. 마지막 때를 염두에 두고 매 순간을 산다면 삶이 달라지리라. 사람들의 평가나 시선이 중요한 게 아니다. 하나님 앞에서 어떤 모습일까를 생각하면 두렵고 떨림으로 설 수밖에 없다.

이 땅에 속한 이삿짐을 정리하고 영원한 본향을 고대하며 이삿짐을 정리하는 지혜를 배우면 어떨까. 우리는 언젠가 나그네 여정을 마친 후에 하나님 앞에 설 날이 있다. 우주적 종말과 개인적 종말이 있을 테지만 그날이 언제이든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삶을 살아야 하지 않을까. 그날이 이르기 전에 하나님 앞에서 각자의 이삿짐을 잘 정돈하고 돌아보길 소망한다.

댓글 남기기

최근 기사

이메일 뉴스 구독

* indicates requir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