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몇해 전 코로나가 기승을 부리기 시작할 무렵, 달라스에서 휴스턴행 아메리칸 에어라인 비행기에 방독면을 착용한 승객이 탑승했다. 승무원은 다른 승객들이 당신의 얼굴을 볼 수 없어 불안해하고 테러리스트 아닌가 염려하니 방독면 벗어달라고 요구하자 그는 거부했다. 결국, 보안요원을 불러 그를 끌어내렸다. 이로 인해 비행기가 한 시간이 지연되었다고 한다. 아마도 그는 코로나바이러스를 많이 걱정했던 것 같았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가 착용한 방독면에는 필터가 없었다고 한다. 정말 황당하다. 필터가 없는 방독면은 그저 거추장 스러운 가면일 뿐이다. 마찬가지로 말씀대로 사는 삶이 없는 그리스도인은 필터가 없는 방독면을 낀 것과 같다.
신약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의 가치에 대해 말한다. 천사의 말을 하고, 예언하고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이 있고, 자신을 불태워 드리는 순교의 삶을 살아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사랑처럼 중요한 가치는 없다. 하지만 사랑처럼 홀대받는 것도 없다. 사랑이 중요하다고 말하지만 정작 사랑하는 사람을 찾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아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는것이다. 초대교회에 등장한 이단 중에 영지주의라는 이단이 있었다. 그들은 구원이 진리를 ‘아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지식을 가지고 깨달음을 가지는 것’이라고 이해한 것이다. 그들은 구원의 비밀을 깨달으면 구원받는다고 가르쳤다. 신비적인 교리를 아는 것이 구원이라는 식으로 사람들을 미혹했다.
하지만 성경은 가르친다. 아는 것은 삶으로 증명되어야 한다. 야고보서에서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아는 것보다 사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신다. 요한 사도는 행위가 없는 믿음의 거짓됨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그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그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요한일서 2:3-4)
오늘날 많은 현대인들은 신앙을 머리로 이해하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다. 믿음이란 아는 것을 전제로 하지만 사는 것을 배제할수 없다. 요한 사도는 계명을 지키는 것이 예수님을 아는 것이라고 말했다. 구원을 받고 믿었다면 반드시 계명을 지키는 삶의 증거가 있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나아가, 실천이 없는 신앙을 거짓이라고 말한다. 그를 아노라 하고 계명을 지키지 않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다. 그 속에 진리가 없다고 강조한다. 주님을 정말 잘 안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성경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 없을 정도다. 구원의 확신도 있다. 교리도 잘 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사기 치고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고 집에서는 가족들에게 폭언과 폭행을 일삼고, 간음죄 속에 살아 간다면, 그가 과연 주님을 아는 것일까?
미국의 어떤 목사님이 한국교회의 부흥을 연구하기 위해 한국에 대형교회를 방문했다. 예배의 열기와 감격에 정말 놀랐다고 한다. 하지만 예배가 끝나고 그는 한 번 더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예배가 끝나고 사람들이 버스를 서로 먼저 타려고 다투고 싸우는 모습 때문이었다.
몇해 전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해 세상이 떠들썩했다. 코로나 바이러스의 문제점은 증상이 없는 사람이 바이러스를 가질 수도 있고 다른 사람을 전염시킬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일반적인 전염병은 증상이 있는 경우에만 전염되었는데 코로나는 증상이 없는 사람도 다른 사람을 감염시킬 수 있다는 것이 큰 문제였다.
바이러스는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렇지만 전염되면 증상이 나온다. 열이 나고 기침이 나고 몸살도 온다. 이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증상을 보고 병원을 찾거나 치료의 방법을 강구한다.
이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믿음의 씨앗이 심어진 사람은 반드시 그 삶에서 증상이 나타난다. 처음 믿을 때는 잠복기처럼 보여 믿음이 있는지 알 수 없을 때도 있다. 그러나 때가 되면 그의 믿음이 드러난다. 그것이 바로 삶의 변화이다. 말씀대로 사는 삶이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마음이고 이웃을 소중히 여겨 사랑하려고 애쓰는 마음이다.
이스트를 밀가루에 뿌리면 작은 양만 섞어도 그것이 크게 확장되어 밀가루를 부풀게 한다. 믿음도 그런 것이다. 믿음이 있으면 삶으로 증거가 나타나게 되어 있다. 예수님을 안다고 하는 것은 단지 지식이 아니다. 마귀도 예수님이 하나님인 것은 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도 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는다.
말씀대로 사는 삶은 그리 쉽게 되지 않는다. 매일 매일 쓰러지고 넘어지고 실패하는 삶이 반복될 수 있다. 하지만 그러한 실패와 넘어짐의 과정을 통해 그리스도인들은 성숙해 간다.
러시아의 대 문호 도스토옙스키는 20년 동안이나 잡동사니만 쓴다는 소리를 들었고 헤밍웨이는 유명해지기 전 정말 재미없는 글만 쓴다는 평을 들었다고 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큰 사람들은 모두 쓰러짐과 넘어짐의 과정을 지난 사람들이다.
말씀대로 살기 힘들다고 쉽게 단정 짓지 말고 오늘 하나님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한가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을 실천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