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4 F
Dallas
일요일, 5월 11, 2025
spot_img

[기영렬 목사] 내가 원하는 예배, 하나님이 원하는 예배 

달라스드림교회 기영렬 목사

보스턴에서 있었던 일이다. 한 부모가 아이의 유아세례를 기념하면서 축하파티를 열었다. 대궐 같은 집으로 친구들을 초청했다.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면서 아이의 유아세례를 축하했다. 파티가 한창일 때 어떤 친구 중 하나가 물었다. 그런데 아기는 어디 있나요? 아기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기 엄마는 깜짝 놀라는 표정을 하더니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집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커다란 침대 한 가운데 잠든 아기를 놔두고 온 것이다. 안타깝게도 아기는 손님들의 던져진 외투에 깔려 이미 질식해 숨을 거둔 상태에 있었다.

정말 가슴 아픈 일이다. 유아 세례 파티였다면 그 중심은 당연히 아이여야만 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아이에게는 관심도 없었다. 오로지 자신들이 먹고 마시는 일에 몰두해 있었다. 어머니는 손님을 접대하는 일에 마음을 빼앗겨 결국 아기를 죽게 만들고 말았다.

이 이야기는 오늘날 교회에서도 반복되고 있다. 예배의 주객이 바뀐 현상이다. 대개의 사람은 예배를 이렇게 생각한다. 말씀에 은혜를 받고, 찬양단과 찬양을 하면서 기쁨과 평안을 얻고, 사람들을 만나 교제하면서 외로움도 달래는 것이다.

틀린 말이 하나도 없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것들은 예배의 목적이 아니라 결과이어야 한다. 예배는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기 위해 하나님께 나아가는 행위이다. 이것은 스포츠 경기에서 관중들의 태도와 유사하다. 경기가 열리면 많은 사람들이 경기장을 찾는다. 그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 부류는 경기를 즐기려고 경기장에 온 사람들이다. 또 다른 부류는 자기가 좋아하는 팀을 응원하기 위해서이다. 같이 경기장에 있지만 목적이 다르다. 한 부류의 사람들은 자기들의 기쁨을 위해서 경기장에 왔지만 다른 부류는 선수들에게 용기를 주기 위해 왔다.

예배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드리는 것이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것이다. 하나님을 찬송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 드리는 것이 예배이다. 예배를 공연에 비유하자면, 하나님이 관객이다. 목사와 찬양팀 성도들은 모두 순서를 통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자기를 위해 예배한다. 목회자는 성도를 기쁘게 하기 위해 감동시키기 위해 설교를 준비하고, 찬양팀도 성도들에게 은혜로운 모습으로 보이고 싶어 찬양하는 일이 많다. 예배는 드려지지만 목적과 방향이 다르다.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 중에 모든 사역자가 공감하는 교회의 목적 중의 하나는 예배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경배하는 예배공동체이다. 본질적으로 하나님께 기쁨과 영광을 올려 드리는 것이 교회의 목적 중의 하나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이 사실을 잊은 채 예배할 때가 많다.

출애굽기에는 가슴 아픈 사건이 등장한다. 모세가 하나님의 율법을 받기 위해 시내 산에 올라간 사이 백성들이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섬긴 일이다. 잠깐 갔다가 올 줄 알았던 모세가 돌아오지 않자 백성들은 불안해졌고 아론에게 몰려가 자신들을 이끌 신을 만들어 달라고 요청했다.

그들은 하나님이 자신들을 떠났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아론은 그들이 가진 귀걸이의 금을 가져오게 하고 녹여서 금송아지 형상을 만들고 나서 사람들에게 외쳤다. 이것이 바로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신 하나님이시다. 이어 신상 앞에 제단을 쌓는다. 그리고 여호와의 성일이라고 자기 마음대로 절기를 선포하고 큰 축제를 벌인다. 백성들은 아침 일찍 일어나 번제물을 금송아지 앞에 올리고 화목제물도 바친다.

모세가 40일 만에 십계명을 받아 돌아와 보니 기가 막혔다. 그는 하나님께 받은 십계의 돌판을 던져 쪼개고 분노한다. 금송아지를 불에 태우고 그것을 마시게 한다. 이 일로 우상숭배에 직접 주동자 격인 약 3천 명이 죽임을 당했다.

이 말씀은 사람들이 얼마나 쉽게 자기중심의 예배에 빠질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했던 것처럼 헌신과 노력이 있어도 자기중심의 예배는 하나님이 받으시지 않는다. 그들은 금을 가져다 바쳤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번제를 드리고 화목제물을 드렸다. 정성을 당해 예배를 드렸다.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위한 예배가 아니라 자신을 위한 예배였다.

가끔 사람들은 열심이라는 것에 속는다. 예전에 우리 조상들은 이른 새벽 찬물로 목욕하고 정화수를 떠 놓고 신령에게 기도를 했다. 불교에서는 삼천 배를 하는 사람도 있다. 무슬림은 40일 동안 해지기까지 물도 먹지 않고 침도 삼키지 않는 금식을 한다. 열심으로 따지면, 기독교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단지 열심히 하는 것보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것을 원하신다.

다윗이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오기 위해 삼만 명을 뽑았다. 새로 수레도 만들었다. 오늘날로 말하면 최첨단 리무진에 법궤를 실은 것이다. 오케스트라를 동원해서 그 앞에 서게 하고 법궤를 이동해 온다. 하지만 쓰러지려는 법궤를 붙잡은 웃사를 하나님은 즉시 죽이신다. 다윗의 헌신을 받지 않으신 것이다. 하나님이 원하는 헌신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법궤는 제사장들이 어깨에 메어야 했다.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었다.

예배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다. 나를 위한 것이 본질적으로 아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도록 드려야 한다. 펜데믹 이후 많은 사람들이 나 중심의 예배에 매몰되어 있다. 내가 편한 데로 내 방식대로 예배해도 된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나 중심 내 만족을 위한 예배는 예배가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예배를 회복해야만 한다.

<요약문장>

이스라엘 백성들이 했던 것처럼 헌신과 노력이 있어도 자기중심의 예배는 하나님이 받으시지 않는다.

하나님은 우리가 단지 열심히 하는 것보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것을 원하신다.

최근 기사

이메일 뉴스 구독

* indicates requir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