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얄론에서 남쪽으로 내려가다가 게제르로 들어 가기 위해 샛길로 빠졌다. 진입로에서부터 여긴 관광객이 오지 않는 동네라는 생각이 진하게 들었다. 우선 들어가는 길에 포장이 전무했다. 겨우내 내린 비 때문에 길이 움푹 파여있고, 폭도 상당히 좁았다. 텔로 올라가는 입구에 주차장이 있는데, 이것도 무지하게 한심했다. 아주 작아서 큰 버스는 돌리기도 힘들어 보였다.
어쨌거나 차를 거기 세우고, 텔로 올라갔다.
텔 위에는 이곳에서 출토된 농사월력의 모조품인 레플리카(replica)가 놓였다. 진본은 이스라엘 박물관에 있단다. 몇 줄 안남은 고대문자를 히브리말로 옮겨서 거기 적어놨다. 문장이 죄다 ‘달’로 시작한다: “이 달에는 뭘 심고, 다음 달에는 뭘 하고.” 워낙 이런 정보를 담은 판대기이니 그게 당연하다. 따지고 보면 우가릿(Ugarit / Ras Shamra)에서 발굴된 바알신화도 일종의 농사월력이었다. 이 땅은 척박하긴 해도 고대에 농업문화가 판치던 곳이었으니, 이런 정보를 담은 판대기가 반드시 필요했겠다.
실제로 이 판대기는 농사월력 이상의 가치가 있다. 말하자면, 쓰여진 글자 형태가 오늘 날의 히브리어와는 아주 다르다. 게제르의 농사월력은 주전 1,200년 경에 만들어졌다. 역사적으로 구분하면 철기시대이고, 성경적으로는 사사시대다. 이때 가나안에서 사용한 히브리어 모양을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가 바로 월력이다.
게제르는 그다지 익숙한 이름이 아니지만, 성경에는 여러 번 언급되었다. 우선 눈에 띄는 걸 살펴보자: “그 때에 게셀(게제르) 왕 호람이 라기스를 도우려고 올라오므로 여호수아가 그와 그의 백성을 쳐서 한 사람도 남기지 아니하였더라” (수 10:33). 여호수아가 이끄는 이스라엘이 라기스를 점령하려 하자, 게제르 왕이 도우러 나섰지만 결국 엉망으로 졌다는 기록이다.
여호수아가 게제르를 점령하자, 이곳을 레위인 그핫 자손에게 주었다 (수 21:20-21). 레위인은 원래 땅을 분배받지 못했는데, 에브라임 지파 땅 일부가 조금 주어졌다. 기록을 보면, 게제르 성읍 뿐만 아니라, 목초지도 주었다고 하니 아얄론 골짜기(평원?) 가운데 일부를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핫자손이 땅을 받았지만, 이곳이 완전한 이스라엘 거주지가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언급했듯이, 이곳은 해안지역의 블레셋과 산지에 자리잡은 이스라엘의 완충지대였다. 아마도 그핫자손은 원주민과 섞여 살았을 것이다. 이스라엘 사람이 이곳을 포기하지 못한 이유는 해안에서 쳐들어 오는 적을 맞는 최전방이 게제르를 포함한 쉐펠라의 성읍들이었기 때문이다.
텔을 빙돌아 가면 솔로몬이 세운 성문과 성벽일부가 나온다. 게제르의 지리적인 여건이 중요했으니 솔로몬이 이걸 그냥 넘겼을 리 없다. 게제르가 확실히 이스라엘에 속하게 된 건, 솔로몬 시절이었다. 솔로몬은 해안평야와 북쪽으로 가는 길의 주도권을 확보하기 위해 게제르를 교두보로 삼았다. 블레셋도 위험했지만, 앗수르 또한 아얄론을 통해서 이스라엘에 쳐들어왔음을 기억하면 알만 하다. 솔로몬이 만든 성문에는 성벽과 면한 방이 양쪽에 세개 씩 전부 여섯 개가 들러 붙었다. 밖에서 뚫고 들어오려면 엄청 힘들었겠다. 솔로몬이 전쟁을 해서 이곳을 얻은 건 아니었다. 그가 펼친 팔색조 외교를 통해서 땅을 받았다. 애굽의 바로(시삭)이 게제르를 점령한 후에 그가 솔로몬과 결혼한 자기 딸에게 지참금조로 게제르를 들려서 보냈다 (왕상 9:16). 그 이래로 솔로몬은 게제르를 잘 활용했다.
성벽으로 오전의 햇살이 넘실댄다. 이곳에 성문을 만들고 성을 보수한(원래 성은 청동기 시절에 처음 만들어졌다) 솔로몬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곳을 확실히 방비하지 않으면, 남쪽에서는 애굽이, 해안에서는 불레셋이, 그리고 북쪽에서는 앗수르가 이스라엘을 못살게 굴었을 것이다. 적의 입장에서는 이곳을 점령해야 산지를 먹을 수 있으니, 호시탐탐 기회를 노렸을 테다. 솔로몬 입장에서는 무엇보다 게제르를 분명히 지켜야만 했다.
텔을 내려오면서 생각했다. 솔로몬이 이곳을 정말로 지켜야 한다고 생각해서 성을 쌓았다면, 나는 내 삶의 어느 곳에 성을 쌓아야 하는가. 내 삶을 노리는 영적인 적은 많다. 나는 무엇을 정말로 지켜야 하는가? 애굽이나 앗수르는 이스라엘보다 힘이 셌다. 그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서도 일어섰다. 솔로몬이 망가진 건, 하나님 없이도 강력한 그들의 힘을 보아서였던가. 어쩌면 솔로몬은 병들었을지도 모른다. 삶의 중요한 곳에 성을 쌓는다 해도, 인간적인 고려는 피해야 하는 거 아닐까.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서, 내 판단으로 중요하다 싶은 곳에 강한 성을 쌓는 일은 전염력이 강하다. 어쩌면 내 삶에 성을 쌓는 것보다, 그분이 어찌 생각하시는지가 더욱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