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달라스드림교회 담임
봄이 되면 집집이 가지치기를 합니다. 죽은 줄기를 잘라내고 필요 없는 가지를 쳐내는 것은 나무를 더 건강하고 아름답게 키워내기 위한 필수적인 과정입니다. 과일나무의 가지치기는 훨씬 더 중요합니다. 가지치기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한 해의 농사가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우리 집에는 배나무가 하나 있습니다. 집을 구입하기 전부터 있었던 나무입니다. 저는 소위 말하는 미국식 배를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미국에 온 지 얼마되지 않았을 때 먹어본 적이 있었는데, 한국 배처럼 달고 맛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집 앞의 배나무이지만 몇 년 동안 거들떠보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우연이 집에 열린 배를 먹게 되었는데, 미국식 배 치고는 정말 달고 맛있었습니다. 그래서 다음 해에는 큰맘 먹고 배나무를 가꾸어 열매를 얻어 보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준비하려니 할 것이 한둘이 아닙니다.
일단 가지를 정돈해 주어야 하는데, 무엇부터 잘라야 할지 몰랐습니다. 유투브를 보니 가지 자르기가 쉬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새로 난 가지가 3년이 되어야 열매가 맺으니 그 가지는 자르면 안 되고 방향이 위로 올라가는 잘라주어야 하는 등 너무나 복잡해 결국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 배운 것이 있었습니다. 가지치기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나무에 햇빛이 고루 스며들고 바람이 잘 통할 수 있도록 가지를 잘라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어떤 분이 카톡에 떠도는 글을 제게 보내주셨습니다. 빈틈이라는 글입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틈이 있어야 햇살도 파고듭니다.
빈틈없는 사람은 박식하고 논리정연해도 정이 가질 않습니다.
틈이 있어야 다른 사람이 들어갈 여지가 있고, 이미 들어온 사람을 편안하게 합니다.
틈이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소통의 창구입니다.
굳이 틈을 가리려 애쓰지 말고, 있는 그대로 열어 놓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 빈틈으로 사람들이 찾아오고, 그들이 인생의 동반자가 되어 삶을 풍요롭고 행복하게 만들어 줄 것입니다.
‘틈’은 허점이 아니라, 여유입니다.
오늘도 마음의 문을 열고, 유연한 생각으로 여유로운 하루가 되었으면 합니다.
이 글을 읽을 때 제일 먼저 생각난 것이 가지치기였습니다. 빈틈이 있어야 나무가 건강하고 열매를 맺는데 사람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빈틈이 축복이요 사람들이 들어올 수 있는 공간이라는 것입니다.
중학교 시절에 들었던 몇 가지 사자성어 중에서 의미가 너무 이상해서 평생 저의 뇌리에 남아있는 단어가 있었습니다. 수청무어(水淸無魚) 물이 지나치게 맑으면 고기가 살 수 없다는 말입니다. 적당하게 더러운 물에 고기가 산다는 말입니다. 바르게 사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던 저에게 이해하기 힘든 의미의 교훈이었습니다. 이 교훈을 들은 후로는 계곡이나 바다를 갈 때마다 수청무어라는 단어를 떠올리면서 고기를 바라보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실제로 그 말은 맞았습니다. 깨끗하고 시원한 계곡물에서는 청정어라는 고기 말고는 찾아보기 힘들었지만 뿌옇고 깨끗하게 보이지 않는 물에는 많은 고기들이 살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수청무어 때문에 한국사회가 부패하게 되었다고 비판합니다. 부패와 거짓을 적당하게 타협하는데 사용된 말이 라는 이유입니다. 사람들은 악해서 자신들의 악을 어떤 말로도 포장할 수 있는 존재이니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말의 뜻은 용서와 관용 너그러움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수청무어라는 말은 중국의 후한서에 나오는 내용으로 반초라는 사람에 관한 이야기에 등장하는 말입니다. 그는 무예가 뛰어나고 인품이 훌륭해서 오랑캐 50여 나라를 복속시켰다고 합니다. 그는 훌륭한 지도자로 그 나라들을 잘 다스렸습니다. 그가 그의 임기를 마치고 후임에게 인수인계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반초는 후임이었던 임상에게 수지청무어(水至淸無魚)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후임이었던 임상은 이 충고를 따르지 않고 자기의 소신대로 나라를 다스렸는데, 반초가 복속시켰던 50개의 나라들이 5년 만에 반란을 일으켜 붕괴되고 말았다고 합니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품고 용서하고 참아주고 인내하는 너그러움이 중요합니다. 실제로 우리 주변에는 너무 빡빡해서 빈틈이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박식하고 논리 정연합니다. 거의 모든 것이 완벽해 보이는 사람입니다. 그러다 보니 들어갈 틈이 없습니다. 결국 그 성품 때문에 자신마저 힘들어집니다.
성경에 나타나는 하나님은 무언가 빈틈이 많아 보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나타나는 탕자의 아버지는 빈틈투성이입니다. 문제 많은 둘째 아들이 유산을 미리 달라고 하는데도 턱 내어 줍니다. 그가 그 돈을 제대로 쓰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말입니다. 아들이 집을 떠나 버렸을 때, 아버지는 매일매일 떠난 자식이 언제 돌아올까 시간을 낭비하면서 그를 기다립니다. 호적에서 지워버려도 마땅치 않은 판에 말입니다. 모든 돈을 허랑방탕하게 날리고 거지의 모습으로 집에 돌아왔을 때는 자기 손에 남은 아버지의 마지막 유산인 인장 반지를 아들의 손에 끼워주고 송아지를 잡습니다. 공정과 원칙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빈틈투성이의 아버지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이 아버지는 하나님 아버지입니다.
하나님은 죄인을 사랑하셨습니다. 완전히 거룩하신 하나님이 말입니다. 그것부터 빈틈입니다. 그리고 아들이신 예수님을 이 땅에 사람으로 보내십니다. 우리의 죄를 대신 예수님에게 짊어지게 하시고 십자가에 죽게 하십니다. 죄인 된 우리를 위해서 말입니다. 우리는 그 사랑을 받을 만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거절하고 무시하고 심지어 욕까지 했던 존재들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이기적이고 의심이 많아 불신하고 가끔씩 하나님을 모른 척 위선적일 때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빈틈이 정말 많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그 품이 우리의 안식처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