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님과의 교제 가운데 회복의 길로 초청
중국집에 갈 때마다 항상 하는 고민이 있습니다. “짜장면을 먹을까? 짬뽕을 먹을까?” 짜장면을 먹으면, 옆사람이 먹고 있는 짬뽕이 먹고 싶고, 짬뽕을 먹으면, 앞사람이 먹고 있는 짜장면이 먹고 싶어집니다. 그래서 저 같은 사람을 위해 짬짜면이라는 메뉴도 나왔습니다.
아마 보신 적이 있으실 것입니다. 그릇인데 반반으로 나뉘어서 한쪽은 짜장면, 다른 한쪽은 짬뽕을 담을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짬짜면도 그 문제를 완전히 해결할 수는 없는 것 같습니다. 또다시 “그럼 짜장면을 먼저 먹어야 하나? 아니면 짬뽕을 먼저 먹어야 하나?” 이쯤 되면 “혹시 내가 결정 장애에 걸린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 정도입니다. 그런데 이게 저만의 문제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오죽하면 짬짜면이 나오질 않나 “양념 반 후라이드 반”과 같은 치킨 메뉴도 있습니다. 그야말로 반반입니다.
그런데 절대로 반반이 될 수 없는 것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깨끗한 물에 더러운 물이 섞이면 반반이 아니라 완전히 더러운 물이 됩니다. 정수한 물에다 정수하지 물을 섞으면 반반이 아니라 마실 수 없는 물이 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한 발은 하나님께 한 발은 세상에 두고 산다면 그것은 반반이 아니라 완전히 세상에 발을 두고 사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소아시아 일곱 교회 중에서 라오디게아 교회와 사데 교회는 우리 주님께 칭찬은 듣지 못하고 야단만 맞았던 교회들로 유명합니다. 사데 교회의 문제가 영적으로 죽어 있으면서도 명목상의 그리스도인들이었다는 것이 문제였다면, 라오디게아 교회의 문제는 거짓된 자기만족에 빠져 있었다는 점이 문제였습니다. 우리가 보기에 “이게 그렇게 큰 문제인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께서는 이 점을 무척 심각하게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그것 때문에 그 흔한 칭찬이나 격려 한마디 듣지 못하고서 야단만 맞았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외세의 침략, 환란, 걱정, 어려움이 거의 없었습니다. 재정적으로 돈이 넘쳐났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오히려 이런 환경 때문에 영적으로 둔하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사실 우리도 어려운 상황을 만나게 될 때 더 하나님께 매달리게 됩니다. 더 간절하게 하나님께 나아가게 됩니다. 어려운 상황을 만날 때 주일예배를 오시는 자세가 벌써 달라집니다.
그렇지만 반대로 상황이 잘 풀리고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흘러가게 될 때 오히려 영적으로 무디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를 평가할 수 있는 평가 기준은 바로 하나님의 진리와 참되심입니다. 하나님의 진리 앞에서 우리 모습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못할 때 자꾸 세상 안에서 우리 모습을 찾으려고 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꾸만 “내가 Business를 이만큼 키웠는데,” “내가 돈을 이만큼 벌었는데,” “내가 이만큼 해냈는데,” “내가 박사인데”와 같은 가치에 매달리고 거기서 자기 자신을 찾으려고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거기서 찾을 수 있는 자아는 거짓된 허상이고 포장된 존재일 뿐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뜨거운 것도 아니고 차가운 것도 아니고, 그야말로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고, 공존의 땅에 살아가는 사람들, 회색지대 삶에 익숙한 사람들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주님은 그런 사람들을 입에서 토해내겠다고 합니다. 절대 용납하지 않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경고하시는 것입니다.
불행히도 라오디게아 교회 성도들은 그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주님 시선과 완전히 반대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자기들은 세상적으로나 영적으로 순풍에 돛을 단 배처럼 너무 잘 나가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물질적으로 풍족하기 때문에 영적으로도 풍족한 사람들이라고 착각하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의 평가는 이렇습니다. “너는 풍족하여 부족한 것이 조금도 없다고 하지만, 실상 너는, 네가 비참하고 불쌍하고 가난하고 눈이 멀고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한다.” (계 3:17)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렇게 구제 불능의 교회에게 이러한 평가 뿐만 아니라 은혜를 허락하십니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와 함께 먹고, 그는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 (계 3:20)
즉, 방법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주님 앞으로 나아가는 것과 주님과 함께 동행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너무 유명하고, 너무 많이 들어 보았고, 너무 잘 아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최악의 상태에 있는 교회, 사실상 주님과 교제가 끊어진 교회에게 하는 말씀입니다.
왜? 이 교회가 다시 예수님과 관계 속으로 들어오도록 하기 위해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이 교회가 회복할 수 있도록 초청하는 말씀입니다. 주님과의 교제 가운데 부유한 교회 공동체, 회복되는 길로 초청하시고 있는 말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