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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5월 16,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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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수 목사] 교회는 본질을 추구하는 일에 더욱 미련해야 합니다.

전남수 목사 알칸사 제자들교회 담임(2003-현) 경북대학교 철학과 및 동대학원 졸(B.A/M.A) 고려신학대학원 졸(M.Div) Missionary Baptist Theological Seminary(Th.M) Houston Graduate School of Theology(D.Min) Central Baptist Theological Seminary 겸임교수

지금 이 시대는 노아의 때와 다르지 않음을 봅니다. 크고 작은 죄악들이 우리의 영적 감각을 무디게 하며 점차 만연해지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심지어 믿음을 말하는 신자들 사이에서도 죄에 대한 기준과 감각이 서로 다르게 작용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세상의 타락 가운데 무엇보다 교회의 책임이 크다고 생각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든 자들을 책망하셨습니다. 강도의 소굴은 어떤 곳입니까? 세상에서 악한 일을 저지른 자들이 자기 소굴로 돌아와 불안함을 씻어내고, 안식을 누리며 편안함을 느끼는 곳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성도들이 세상에서 지은 죄와 잘못들을 예배를 통해 책망하고 교정하는 곳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많은 교회는, 성도들의 죄를 씻어주는 회개의 자리로서의 예배보다는, 죄와 무관한 편안함과 만족만을 주려는 데에 집중하고 있는 듯합니다. 주님께서 이러한 교회들의 모습을 바라보시며 어떤 말씀을 하실지 고민해야 할 때입니다.
죄를 죄로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영혼에 치명적입니다. 말씀과 성령에 무감각해지는 편안함과 익숙함은 마치 따뜻한 물속에서 죽어가는 개구리처럼, 영혼을 서서히 병들게 하고 결국은 죽음에 이르게 합니다. 신앙생활은 익숙함이라는 관성의 영향에 경계심을 가져야 합니다. 익숙함은 반복에서 오는 편안함이지만, 신앙에 있어서는 마땅히 늘 깨어 있어야 하며, 한밤중에도 주님을 만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익숙함은 세상의 일과 기술에는 유익할 수 있지만, 신앙에는 반드시 경계해야 할 요소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인공지능의 발달을 포함한 편리함의 극치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삶의 불편을 견디지 못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신앙생활도 예외는 아닙니다. 고난의 불편함을 인내와 기쁨으로 지나야 함에도 불구하고, 불편하다는 이유로 쉽게 부정하고 원망하며 등을 돌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현상들을 배려하여 교회는 성도들이 불편을 느끼지 않도록 많은 것을 배려하려 애를 씁니다. 당연한 섬김의 모습일 수 있지만, 때로는 성도들이 성장하고 성숙해져야 할 때에도 영적 어린아이의 수준에 머물게 하는 과보호가 되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설교, 성경공부, 구역모임, 봉사 활동 등 모든 영역에서 불편한 요소들을 제거하고, 소비자 중심으로 교회가 운영되는 경향이 보입니다. 마치 쇼핑몰에서 자신의 기호에 맞는 물건을 고르듯, 교회 생활과 예배를 선택하려는 모습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일은 조금 더 헌금을 하고, 유급 사역자를 통해 처리하게 하며, 자신은 그 열매만 누리기를 원하는 풍조가 퍼지고 있습니다. 어떤 교회는 3년마다 목회자가 바뀌는 사례도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이유는 설교를 3년간 들었으면 이제 더 들을 것이 없다는 생각 때문이라고 합니다. 기가 찰 노릇입니다.
이러한 말씀의 훈련과 순종의 결여로 인해, 말씀에 근거한 반응보다는 감정적으로 쉽게 삐치고 작은 일에도 참지 못하며 사나워지는 일이 반복되는 것을 봅니다. 자기 영혼을 다스리지 못한 거친 모습들이 오히려 무기가 되어 서로를 찌르는 상황이 됩니다. 불편함을 견디지 못하는 이기적인 개인주의가 교회를 병들게 하는 원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결국 자신의 편리함의 기준에 맞지 않다고 여기는 성도들은 또 다른 편안함을 찾아 교회를 옮기게 됩니다.
주일에도 교회 보다는 커피숍을 찾아 성경을 꺼내는 이들이 많다고 합니다. 딱딱한 장의자, 지루하게 느껴지는 예배 순서, 사람들과의 관계, 봉사와 헌신의 부담 등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하는 이유 탓입니다. 불편함을 견디지 못하는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간섭이나 봉사의 부담이 없는 미국 교회를 통해 신앙의 명맥만 유지하고, 더 심한 경우는 아예 교회 생활을 포기하기도 합니다.
깨어 있지 못하고 교회 생활의 편안함만을 추구하는 자세는 결국 개인의 신앙성장에 큰 해가 됩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이러한 편안함을 보장하려고 무진 애를 씁니다. 교회가 세상의 흐름을 따라 성도들의 요구에 타협하면서 본질을 잃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려스럽습니다.
교회에서 진리를 듣지 못하면, 어디서 들을 수 있겠습니까? 교회가 성도를 교훈하고 책망하며 바른길로 인도하지 않는다면, 그 역할을 누가 대신할 수 있겠습니까? 때가 되면 깨달을 날이 올 것이라며 괜찮다고 말하지만, 이는 병든 몸에 피부약만 바르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영적인 억압과 세상의 억압, 죄의 억압이 더욱 심화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나아갑니다.
이제는 교회가 깨어 경성하며, 세상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담대히 선포해야 할 때입니다. 그 시작은 교회의 온전한 회복, 곧 예배의 회복이어야 합니다. 교회와 성도들이 영적인 잠에서 깨어날 때, 비로소 세상을 향해 각성을 촉구할 수 있습니다. 교회와 예배의 회복이야말로 세상을 깨우고 주님의 다시 오심을 예비하는 축복의 길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치유하겠다는 외침 이전에, 교회가 먼저 회복되어야 합니다. 편리함과 소비자 중심주의에 물든 생각을 제거해야 합니다. 사람의 기호와 편의를 따라가는 교회는 결코 회복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과 말씀에 따라 교회와 예배가 회복될 때, 참된 소망이 있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세상에서 자신의 목적을 이루는 수단으로 생각하려 합니다. 신앙생활이 아니라 종교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원합니다. 그 길은 함께 망하는 길입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교회가 참된 교회로서의 본질을 회복해야 합니다. 소비자 중심주의, 편리주의, 이기적 개인주의를 벗어나, 참된 진리를 선포하고 진리 안에서 깨어날 때, 세상도 함께 깨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교회는 본질을 추구하는 일에 더욱 미련해져야 합니다. 우직할 정도로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말씀과 성령 안에서 예배하는 일에 모든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거기에 진정한 소망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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