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눈을 잠들게 하지 말며 눈꺼풀을 감기게 하지 말고”(잠6:4)
앞의 3절에서는 올무와 함정에 빠지게 되었을 때에 빠져나오기 위한 방법으로 5개의 긍정 명령어를 통하여 권면했었습니다. 이제 본 절에서는 절망 앞에서 자포자기(自暴自棄)하는 사람에게 부정 명령어로 권면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 ‘하지’로 번역한 히브리어 단어 ‘나탄’(נתן)은 ‘내주다’(to give), 당연한 것처럼 ‘탓으로 돌리다’(to ascribe)는 뜻으로 눈이 잠들려고 하는 것에 그냥 맡겨놓고 있거나 눈꺼풀이 자기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자꾸 내려오는 것을 그냥 허락해 두는 것을 가리킵니다. 부정어를 첨부하였으니 눈동자가 초점을 잃어버리도록 몽롱한 상태에 빠지는 것을 그냥 허락하지 말라는 것이며, 눈꺼풀이 힘을 잃어버리고 내려앉고 감기는 것을 방치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 위기를 만나 절망적 상황에 놓였는데 눈이 감기게 된 것입니까?
그것은 낙심과 포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입니다.
사회 심리학에 ‘코쿠닝 현상’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코쿠닝(Cocooning)은 ‘누에고치’(Cocoon)에서 따온 말로 ‘과도한 스트레스를 피하여 숨는 행위’를 뜻합니다. 어떤 충격이나 난감한 문제로 인하여 받은 스트레스를 피하여 숨는 행위로서, 아무도 모르는 자기만의 껍질 속으로 숨으려는 현상입니다. 지금 우리 주변에도 코쿠닝 현상들이 물밀듯이 밀려오고 있습니다. 코로나 때문에, 경제적 파탄을 만나면서 충격과 스트레스로 녹다운(Nock down) 직전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경제적인 어려움, 가족들에게서 버림받음, 실직으로 인한 허탈감, 경제적 궁핍함… 등에 빠진 것입니다. 그리고 삶의 허탈감, 상실감 등이 겹치면서 자신의 힘든 처지를 회피하기 위하여 숨으려는 현상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는 “자기만의 껍질 속에 숨어 들어가 긴장을 풀고, 스트레스를 해소하려는 것으로 은둔하기도 하고, 가출도 하고, 잠적도 하고, 사람 만나기를 거부하기도 하며, 삶을 포기하기도 하고, 마침내 자살을 선택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신앙인 엘리야에게 일어난 현상이기도 합니다.
아무리 몸부림치며 일해도 결과는 없는 것 같고, 사람들은 전부 불의의 편에 서서 자기 혼자만 남아 싸우는 것 같고, 하나님의 기적적 역사 앞에서도 악마의 세력은 더욱 기승을 부리는 것 같아서 낙심한 것입니다. 그러자 엘리야는 멀리 광야로 도망가. 로뎀나무 아래서 기력을 상실한 채 잠에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만사가 귀찮아지니 눈꺼풀이 올라가지를 않습니다. 결국 죽음을 동경(憧憬)하는 자리까지 나아가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문제 앞에서 ‘코쿠닝 현상’에 빠지거나 ‘엘리야의 낙심 현상’에 떨어져서는 안 됩니다. 정신을 차리고 눈을 번쩍 떠야만 합니다.
“주님, 문제 앞에서 엘리야처럼 낙심하지 말게 하옵소서. 오히려 저에게 더욱 각성하는 정신과 난제를 향하여 도전하는 정신을 주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