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을 읽다 보면 우리의 문화와 달라서 받아들이기에 어려움이 있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는 예수님을 따르던 한 제자가 예수님에게 자신의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므로 먼저 아버지를 장사하고 돌아오게 해달라는 요청과 관련된 것입니다. 육신의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씀에 어긋나지도 않고,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아들이 가서 장사를 지내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제자에게 아버지를 장사하기 위해 떠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마 8:22)”고 말씀하시는 것이지요. 아버지를 장사하고 돌아오겠다는 한 제자의 요청에 그것조차 허락하지 않으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굉장히 차갑게 느껴집니다. 예수님은 왜 아버지의 장사조차 지내지 못하도록 하셨던 것일까요?
영원한 것은 없고 요즈음은 더 많은 것들이 빨리 변합니다. 그러나 그 중에서 가장 느리게 변화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장례 문화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때는 그 슬픔이 크고 경황이 없기에 장례 문화에 새로운 것들을 도입하며 변화를 꾀하기가 어렵습니다. 고대 팔레스타인의 장례문화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스라엘 민족들의 기원이 유목민인지, 정착민인지 혹은 반유목민인지에 대해서는 학자들의 논란이 있으나 적어도 유목민적 문화를 소유한 집단이 그들의 문화 형성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유추하게 하는 많은 흔적들이 있습니다. 그중 하나가 장례문화입니다. 유목민들은 유랑하며 가축들을 먹입니다. 그러한 생활을 하는 중에 상(喪)을 당하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아무 곳에나 땅을 파고 매장을 하기는 어려웠습니다. 좋지 않은 땅일 경우 후에 홍수가 날 수도 있고, 혹은 잘 관리가 되지 않으면 고인의 시신을 동물들이 훼손할 수 있는 위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유목민들은 그들의 장례 문화를 ‘2차 매장’이라고 불리는 방식으로 발전시켰습니다. 유목 생활의 이동 중에 누군가 죽게 되면, 그의 시신을 일단 1차로 매장합니다. 이때 사용하는 방식은 주로 동물이 시신을 훼손하지 못하도록 돌을 쌓아 무덤을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간단히 1차 매장을 하고 다시 유목 생활로 돌아갑니다. 후에 1년 혹은 2~3년 후에 같은 장소에 다시 이르게 되면 이미 다 부패하여 유골만 남은 시신을 수거하여 “유골함(ossuary)”에 보관합니다. 그러고는 이 유골함을 지니고 다시 유목하는 것이지요. 그러다가 선대 가족들이 묻힌 장소에 이르게 되면 그 유골함을 제대로 2차로 매장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정착해서 살 때에도 이러한 장례문화는 쉽게 바뀌지 않았습니다. 유목 생활을 더 이상 하지 않으니, 돌무덤은 필요하지 않았지만, 여전히 두 번의 매장 관습을 유지했던 것이지요. 신약성경이 쓰여지던 시대는 두 개의 방으로 구성된 무덤이 전형적인 형태의 무덤이었습니다. 누군가가 죽으면 그 시신을 세마포에 싸서 그대로 눕히는 방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방은 이미 부패한 시신을 담은 유골함이 놓여 있는 방이었습니다. 유골함이 놓여 있는 방에는 하나의 유골함만 놓여지는 것이 아니라 앞서가신 집안의 모든 사람들의 유골함이 함께 놓여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방을 ‘조상들의 집’ 혹은 ‘아비들의 집’이라 불렀습니다. 무덤의 구조와 무덤 내의 방의 위치는 무덤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기도 합니다. 예수님을 매장한 골고다 주변, 성묘교회 내의 시리아 정교회 영역에서 발견된 공간은 유골함을 안치하는 방과 세마포에 싼 시신을 놓는 방이 일렬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안쪽 방에 아직 부패하지 않은 시신을 두고 바깥쪽 방에 유골함을 두는 것이지요. 히브리대학 인문대 캠퍼스 내에 위치한 동일한 시대의 무덤은 방이 병렬식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통하여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신약성서가 기록되던 시대까지 고대 팔레스타인의 장례 문화는 2차 매장의 관습을 따라 두 번의 매장 절차를 거쳤다는 것입니다. 기원후 500년경 바리새 파 유대인들의 관습을 담은 미쉬나(Mishina)에는 이 2차 매장을 하는 날, 즉 먼저 매장했던 시신이 다 부패하고 남은 유골을 유골함에 담아 안치하는 날을 기뻐해야 할 날이라고 설명합니다(מועד קטן). 이때가 되어서야 진정한 장례를 마친 것이고, 비소로 이날이 되어서야 죽은 자가 율법을 지켜야 하는 모든 의무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장례는 1차 매장의 순간부터 2차 매장의 순간까지 짧으면 1년, 길면 2~3년의 기간 동안 이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 아버지를 장사하고 오겠다고 한 제자의 요청은 잠시 장사를 지내고 오겠다는 것이 아니라 꽤 긴 시간 동안 예수님을 떠나 있겠다고 말했던 것이지요.
우리가 이해하기 어렵고 받아들이기 힘든 내용이라고 할지라도 성경에 기록된 모든 이야기에는 하나님의 깊은 뜻이 담겨 있습니다. 성경을 읽고 곱씹으며 묵상할수록 그 은혜가 더 커지는 이유입니다. 내 생각과 나의 경험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늠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 담긴 깊은 은혜를 더욱 깊이 있게 체험하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