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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4월 21,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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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광문 목사] 영적 자가격리

안광문 목사(생명샘교회)

그 어떤 관계보다도 하나님과의 관계를 우선시해야만

갈라디아서 1장 16절 뒤 부분을 보면 “그 때에 나는 사람들과 의논하지 않았고,”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그때”는 바울이 다마스쿠스로 가던 길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고 이방 선교 사역에 대한 사명을 받았을 때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때 바울은 경험했던 사건에 대해 사람들과 의논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17절 앞부분에 “또 나보다 먼저 사도가 된 사람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도 않았습니다.”라고 합니다. 여기에서 “먼저 사도가 된 사람들”은 예수님의 12 제자, 예를 들면, 베드로, 요한, 야고보 같은 분을 말합니다. 바울은 이런 분들을 만나서 상의하려고 예루살렘을 방문하지도 않았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서 삶 전체를 완전히 바꿔 버렸던 엄청난 사건을 체험하고 인생의 궤도를 수정하기에 앞서 평소에 의지했던 사람들과 먼저 사도 된 사람들에게 어떤 정보나 교훈, 확증이나 승인을 얻기 위해 그분들을 만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는데 이는 바울 자신의 사도 됨에 있어 어떠한 인간적 개입이나 의존도 없었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17절의 뒷부분에서 보면, “나는 곧바로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마스쿠스로 되돌아갔습니다.”라고 합니다. 여기서 아라비아는 현재의 사우디아라비아나 예멘, 오만과 같은 지역이 아니라 아라비아반도 북쪽, 즉 요르단 남부 지역일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1장 32절에서 “다마스쿠스에서는 아레다 왕의 총리가 나를 잡으려고 다마스쿠스 성을 지키고 있었으나,”라고 하는데, 여기서 “아레다 왕”은 나바테아 왕국의 아레다 4세입니다. 바울을 죽이려 하는 유대 사람들과 이 왕이 보낸 사람들이 바울을 잡으려고 다마스쿠스에 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왕이 왜 바울을 잡으러 사람을 보냈을까요? 이는 바로 바울이 이 왕이 통치하던 나바테아 왕국에 있었다는 증거이고, 아라비아가 나바테아 왕국, 즉 현재 요르단 페트라 지역을 말씀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지역은 사막 지역에 어마어마한 협곡과 자연 절벽으로 둘러싸인 곳입니다. 바울은 왜 그런 곳으로 갔었을까요? 인간적인 의존이나 개입을 완전하게 배제한 채 하나님과 개인적인 교제를 나누기 위해 그곳에 갔을 것입니다. 모든 사람과 관계에서 벗어나 오직 하나님과의 특별하고 내밀한 교제의 시간을 갖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모든 관계보다 우선해야 할 관계가 하나님과 관계라는 사실을 잘 알지만, 실제적인 삶에 있어 하나님과 관계보다 사람과의 관계를 더 우선시하고, 사람과의 관계에서 더 눈치를 봐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람과 관계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를 소홀하게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신학교 다닐 때 신학 공부하는 것 때문에, 그러니까 숙제도 해야 하고 시험공부도 해야 하고 거기다 주일에 사역도 해야 했기 때문에. 성경 읽을 시간이 없었습니다. 목사가 되겠다고 신학을 공부하는 신학생이 신학 공부하려고, 사역을 하려고 성경 읽고, 기도할 시간이 없다는 것이 말이 될까요? 저는 매일 아침 교회 사무실에 출근해서 먼저 기도하고, 성경 읽고, 말씀 묵상합니다. 그런데 박사 논문을 쓰는데 막판으로 몰리니까 아침에 기도하고, 성경을 읽고, 묵상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신학박사가 되겠다고 신학 논문 쓰다 보니까 기도하고, 성경 읽고, 묵상할 시간이 없다는 것이 말이 되나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구원받은 하나님 자녀입니다. 그런데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문제가 터졌을 때, 하나님 앞으로 나와서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기보다도 이리저리 사람들을 찾아다니고 – 물론 사람들을 찾아가 도움을 구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렇지만 문제는 패닉 상태에 빠져 기도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한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하나님의 자녀라면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요?
물론, 우리가 바라보고 의지하는 분들은 정말 좋은 분들입니다. 존경하고, 사랑해야 하는 분들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 대신 신뢰하거나 의지할 수 있는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그분들도 얼마든지 바뀔 수 있고, 궁극적으로 우리 삶을 책임질 수 없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를 위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친밀한 관계라고 하더라도 영원히 지속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친밀한 관계라고 하더라도 그 깊이가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언제나 변치 않으시는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 모든 삶을 책임져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어떤 관계보다도 하나님과의 관계를 우선시해야만 합니다. 그렇게 될 때 만족할 삶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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