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들의 신앙생활이 다양해져 감을 봅니다. 여러 이유 중의 한가지가 엄청난 인터넷 문화의 발달과 영상시대가 열렸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인터넷의 발달은 삶의 편리와 유익함도 가져다 주지만, 정말 중요한 영적인 부분에서는 상당히 주의가 필요한 일들이 나타나는 것을 봅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말씀에 대한 접근성, 말씀 듣는 통로가 다양해졌다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내가 섬기는 교회, 우리 담임 목사님 그렇게 특정이 되었는데, 이제는 명목상의 담임목사님은 있을지 몰라도, 담임목사님을 유일무이하게 내게 하나님의 음성을 들려주시는 분이라는 의식과 생각은 잘 가지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실제로, 어떤 분에게는 담임목사님이 한 분이 아니라, 넷 다섯명은 모시고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그런 분들을 보면, 전화기 창에 여러 교회의 앱이 있습니다. 이름난 교회, 유명한 목사님들의 교회 앱이 많이 등장합니다. 분당 어느 교회, 거기다가 친정교회 또 아는 친구 목사님 교회, 여차하면 상담하는 목사님 교회 등, 취향(?)에 따라 종류별로 있습니다. 그리고 담임 목사님의 설교를 들을 수 있는 앱 하나도 띄워놓습니다.
이런 영적 형편 속에서 본다면, 출석하는 교회 담임 목사님이라는 존재도 그저 여러 목사님들 가운데 계시는 한 분정도(one of them)에 불과하게 여겨질 것입니다. 그런 분들에게 교회를 섬기며 주일에 주의 말씀을 듣는 의미는 무엇일까를 생각해 됩니다. 내가 마음대로 취사선택해서 들을 수 있는 말씀, 내가 주관적으로 선택한 목사님의 입에서 증거되는 그 설교를 과연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을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과연, 순종하고 복종하므로, 삶의 변화를 꿈꾸는 가슴 두근거리는 말씀이 될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결코 건강하고 온전한 신앙생활이 될 수 없을 것입니다.
게다가, 한국과 시차가 있으니, 토요일에 영상으로 한국의 주일 예배를 보고 난 뒤에, 섬기는 교회는 그저 식사와 친교를 위한 방문자로 등장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날 들으며 받은 은혜가 있노라며 간증하고 나누기도 합니다. 옆에 사람에게 전도도 합니다. ‘오늘 그 설교 너 들어라고 하는 소리 같더라. 꼭 들어보라’고 까지 합니다. 마치 시장의 좋은 물건을 소개하는 이웃집 아줌마 같습니다. 존귀한 성도의 모습이 아닙니다.
이렇게 자기 나름의 은혜만을 추구하는 분들의 신앙생활은, 보지 않아도 그 열매를 알 것 같습니다. 결코 자신과 교회와 목회자를 하나님의 섭리안에서 운명적인 만남으로 보기 어려울 것입니다. 몸으로 교회에 나아가 말씀을 듣는다고 하여도, 설교자가 전하는 현장의 말씀도 여러 목사님들의 의견중에 하나로 받아들일 것입니다. 결국 누가 손해입니까? 더 이상 교회에서 들려지는 말씀이 그 잠든 영혼을 깨우지 못하게 되고 이성적 판단의 한 부분에 멈춰져 버린다면, 신앙생활의 폐해는 오롯이 자신의 몫이 될 것입니다.
내가 섬기는 교회가 분명하지 않고 내가 누구에게 말씀을 듣는가가 분명하지 않으면, 신앙이 건강하게 자랄 수 없습니다. 말씀은 영혼의 양식인데, 이곳 저곳 마치 동냥젖 얻어 먹고 자란 사람들처럼, 좋은 건강을 지켜내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가난한 살림에 맛이 없어 보여도, 집밥을 먹는 사람이 건강합니다. 사랑의 관계 속에서 빚어낸 음식이기 때문입니다.
어릴 때 보면 부모님들이 목사님을 뭐라고 불렀습니까? 육신의 양식을 위해 돈을 벌어 와서 먹여주는 이를 육신의 아버지라고 부르기에, 영의 양식을 나누어 주는 목사님을 영적인 아비라고 불렀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디 멀리 출타하게 되면 꼭 이야기하고 목사님 기도받고 가고, 또 돌아오면 돌아왔다고 이야기하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그런 경우가 어디 있습니까? 있다면 율법적이라고 손가락질 할 것입니다. 자신이 동의하기 어렵고, 자신이 하기 싫으면 제일 많이 손가락질 하는 내용이 ‘율법적’이라는 말입니다. 복음적으로 이야기하라고 합니다. 복음의 무한한 자유를 말하라고 합니다. 참된 복음의 감격은 말씀에 자신을 더욱 매이고 싶어한다는 단순한 용법도 모르는 생각입니다.
이순신 장군처럼 자신의 거취를 알리지 아니하고, 아무도 모르게 사라졌다가, 어느날 갑자기 나타나고 그런 경우가 많습니다. 더 나아가 이제는 목회자 스스로도 성도의 거취를 알려하지 아니하고, 성도 자신도 알리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양과 목자의 생명 관계속에서 가정같은 교회를 꿈꾼다고 선언합니다. 뭔가 대단히 이상한 것 같습니다.
육신의 아버지라 해도 철든 자식이라면 멀리 다녀오고 만남이 기다려지는 날에 보이지 않아 궁금할 것 같으면 이야기를 할 텐데, 약속된 예배를 위한 주일을 빠지면서까지 이야기하지 못한다면, 담임 목사라는 존재는 어떤 의미인가를 생각해 봅니다.
많지 않은 경우겠지만, 아마도 이런 고민을 하게 될 것입니다. ‘나는 영적 아비인가? 아니면 이웃집 아저씨인가?’ 아저씨와 아버지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아버지는 모든 것을 알고 자녀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자기 생명도 내어놓는 분이지만 이웃집 아저씨는 그런 존재가 아닙니다. 그저 내가 원할 때 필요할 때 부르면 와서 도와주는 분에 불과한 분입니다. 나의 필요를 위해 부를 수도 부르지 않을 수도 있는 존재일 뿐입니다.
오늘날, 이런 교회의 모습이 당연한 듯 지나갑니다. 목자와 양이 서로 알지 못합니다. 알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정말 주님이 원하시는 성경적인 교회 공동체의 모습일까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이러한 말세의 세태에도 혹여 우리 교회 우리 목사님은 그렇지 않다는 생각을 가지고, 하나님의 음성인 영혼의 양식을 주시는 목사님과 주의 종을 영적 아비로 생각하고 사랑하고 또한 섬길 수 있다면 그런 분은 분명 복 받은 성도일 것입니다. 말씀에 대한 단 순종과 복종이 이루어짐으로, 그의 삶에 말씀의 참 능력이 나타날 것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