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리아는 누구보다도 예수님을 사랑했던 여인이다. 예수님의 죽음이 점점 다가오고 있는 시점에 마리아는 고가의 향유를 예수님께 부었다.
그 향유의 가격을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그 가격을 들은 제자들은 분개하였다고 한다.
값 비싼 향유를 다른 사람도 아닌 자신들의 선생이며 앞으로 왕이 되실 분에게 부었는데 왜 그렇게 화가 났을까? 아마도 자신들의 서열 다툼에 마리아가 끼어들었다는 생각이 들어 큰 위기감이 들었던 것 같다.
사실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 계속 언급하셨다. 그렇게 예수님께서 죽음의 대한 이야기를 반복적으로 하셨지만 아무도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것을 귀 기울여 듣지 않았다. 예수님의 때에 자신들이 어떤 큰 자리를 차지할 것인가에 대한 자리 싸움만 치열하게 벌이고 있었던 제자들에게 갑자기 뜻하지 않은 또 다른 경쟁자가 나타난 것이다. 그것도 자신들이 들이밀 수 없는 몇 만불 상당의 고가의 향유를 예수님께 다 부은 것이다.
제자들은 큰 위기감이 들었을 것이다. 어떻게 해서든 그 여인의 행동의 가치를 떨어 뜨려야 한다. 하여 ‘그 향유를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줘야지’ 하며 예수님께서 그렇게 좋아하시는 가난한 자들을 돕는 구제라는 프레임으로 그 가치를 떨어뜨리려고 애썼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번 만큼은 철저히 마리아 편이다. 오히려 예수님은 앞으로 복음이 전해지는 곳 마다 이 여인의 행동도 함께 전해질거라고 하시며 엄청난 크레딧을 마리아에게 주었다.
마리아의 행동은 어떤 행동이었길래 예수님께서 복음의 소식에 꼭 함께 가야하는 행동이라고 말씀하셨을까?
마리아의 행동은 자리 싸움 또는 예수님의 인정을 바란 정치 행위가 아니었다. 오로지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온 진실된 행동이었다.
아무도 예수님의 죽음을 심각하게 듣지 않고 자신들의 안위만 계산하고 있을 때에 그 죽음의 이야기를 그냥 흘러보내지 못한 사람이 마리아이다. 왜냐하면 마리아는 예수님을 너무나도 사랑했고, 사랑하는 사람은 언제나 상대방의 감정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
죽음이 점점 다가 올 수록 예수님은 깊은 고민에 빠지셨을 것이고, 그 깊은 염려와 두려움이 표정으로 때론 한숨으로 드러났을것이다. 마리아는 그 예수님의 감정을 함께 느낄 수 있었고 그런 답답한 마음에 무엇이라도 해 드렸으면 좋겠는데 하며, 맘 졸임 끝에 자신에게 전 재산이나 다름 없었던 향유를 예수님께 부은 것이다.
이 향유의 부음이 마리아가 예수님의 죽음을 준비하고 한 행동은 아니다. 그러나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한 진정한 행동은 언제나 그 행동의 표준의 결과 값 이상의 결실을 만들어 낸다. 즉 사랑의 진실된 행동은 사람을 변하게 하고 상황을 변하게 하는 기적의 결과 값을 내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깊은 사랑을 보신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앞으로 복음이 전해지는 곳 마다 이 여인의 행동도 함께 전해 져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시고 그를 죽이시고 다시 살리신 행동은 오로지 우리를 향하신 애 끓는 사랑에서 나온 행동이다. 그 진실된 사랑이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참된 기적을 만들었다.
그렇다면 우리가 받은 구원은 무엇인가?
사랑의 구원이다! 끔찍한 사랑이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사랑이다!
그렇다면 그 사랑을 받아 누리는 우리가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 의무가 아니다. 열심도 아니다. 헌신도 아니다. 사랑이다!
사랑을 받았으면 사랑으로 돌려 드리는 것이다. 생명 값으로 받은 사랑을 알량한 의무로 돌려드릴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의 단순한 의무와 종교적 열심은 우리에게 어떤 만족감을 줄수는 있지만 또는 노력의 크고 작은 결과물을 만들수 있지만 하나님 복음의 역사에는 함께 기록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의 노력 값은 하나님의 사랑 값에 비하면 0.01%의 가치도 없기 때문에 그렇다. 제자들의 헌신과 노력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그리고 십자가에서 그 가치가 드러나 버렸다.
그러나 마리아의 사랑의 행동은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한것도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죽음의 첫 준비를 하는 아주 중요한 이정표적인 행동이 되었다. 그렇게 될 수 있었던 유일한 이유는 예수님께서 그렇게 인정해 주셨기 때문이다. 그 행위에는 진정한 사랑이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도 우리가 간절히 바라는 것은 우리의 삶이 예수님께서 인정 하시는 삶을 사는 것일 것이다. 예수님께서 인정 하시는 삶, 그리고 복음의 역사의 함께 기록 될 만한 가치있는 삶은 단순히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의무와 열심이 아니다.
사랑으로 받았으면 사랑으로 돌려 드리는 것이 구원의 공식, 복음의 공식에 맞는 삶일 것이다. 고난주간과 부횔절을 보내며 단순한 행동의 절제가 아닌 참된 사랑의 회복이 일어날수 있는 기간이 되길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