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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4월 21,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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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민 목사] 빌립보 가이사랴에서의 고백

최승민 목사 플라워마운드 교회 동역목사

배경과 더불어 읽는 성경(21)

복음서에서 묘사하는 예수님의 일대기에서 중요한 기점이 되는 사건이 있습니다. 바로 베드로가 예수님을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라고 고백하는 사건입니다. 이때 처음으로 베드로는 예수님을 단순히 기적을 일으키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자 그리스도로 고백합니다. 그래서 마가복음에서는 베드로의 이 고백을 전후로 하여 사람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예수님의 모습이 달라지기도 합니다. 이전에는 기적을 통해서 은혜를 베푸셨을 때마다 모든 사람에게 자신이 기적을 베푼 것을 알리지 말라고 말하셨던 반면, 베드로의 고백 이후에는 달라지는 것이지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자 그리스도인 것을 제자들도 알아보지 못한 상태에서 예수님께서 행한 기적만 널리 알려질 경우 그를 기적을 행하는 한낱 마술사와 같은 존재로 오해하는 불상사를 막기 위함이었습니다.
이토록 중요한 의미가 있는 베드로의 고백은 사실 그 배경을 이해할 때 그 의미가 더 깊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에 대한 올바른 신앙을 고백한 곳은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이었습니다(마 16:13). 당시에는 로마의 황제를 ‘가이사’라고 불렀습니다. 세금과 관련된 논쟁에서 예수님께서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바치라(마 22:21)”라고 하신 것에서 잘 알 수 있습니다. 당시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통치하던 헤롯 가문 권력자들은 로마 황제의 비호 아래에서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태어나실 당시에 예수님을 죽이고자 했던 헤롯 대왕(Herod the Great)도 욥바 북부에 큰 계획도시를 건설하고 그 이름을 ‘가이사랴’라고 부르며 로마의 황제에게 바쳤습니다. 그의 아들이었던 헤롯 빌립(Philip the Tetrarch)도 자신의 아버지와 같이 다른 지역에 도시를 건설하여 황제에게 바치며 마찬가지로 ‘가이사랴(Caesarea)’라고 이름을 붙였던 것이지요. 자신의 아버지가 건설한 가이사랴와 구분하기 위해서 ‘가이사랴 빌립보(Caesarea Philippi)’ 혹은 ‘빌립보 가이사랴’로 불렸습니다.
가이사랴 빌립보는 이집트에서부터 지중해 안을 타고 이어져 온 해변길(via Maris)이 내륙으로 들어와 갈릴리 호수를 지나고 골란고원을 넘어 다메섹으로 이어지는 중간 지점에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도 다메섹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기 위해 길을 떠날 때 이 길을 지나갔을 가능성이 큽니다. 이처럼 주요한 국제 도로가 지나는 곳에 있는 가이사랴 빌립보였기에 상인들을 비롯한 다양한 배경의 많은 사람들이 통행했습니다. 고대 시대에 먼 길을 여행한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다양한 위험을 수반하는 것이었고 그만큼 우상숭배 욕구도 강했습니다. 그래서 가이사랴 빌립보에는 그러한 이들의 욕구를 이용하는 우상숭배 산업이 발달해 있었습니다. 로마의 황제를 기쁘게 하는 황제 신전은 물론이고 그 지역에서 섬기던 목축의 신 판(Pan)을 비롯하여 염소 신 등 셀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신들이 여행자들의 마음을 끌기 위해 화려한 모습을 경쟁적으로 갖추어 가던 곳이 가이사랴 빌립보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 들리셨을 때, 예수님의 모습은 화려한 우상들과는 사뭇 달랐을 것입니다. 우상들은 서로 경쟁적으로 날마다 화려함을 더 해가며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 위해 애썼으나 예수님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는커녕 오히려 복음을 전하고 많은 영혼들을 돌보시느라 남루하고 피폐(疲弊) 한 모습에 가까웠기 때문입니다. 사역에 몰두하며 화려한 겉모습에 전혀 신경을 쓰시지 않으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이사야서의 예언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사 53:2)” 실로 예수님의 모습은 보잘 것이 없었습니다. 더욱이 가이사랴 빌립보에서는 예수님의 보잘 것 없는 모습이 더 극대화 되어 보였을 것입니다. 대비되는 화려한 우상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놀라운 것은 예수님께서 바로 이 시점에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 하느냐(마 16:15)”고 물으신다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 조금 더 전략적으로 생각하셨다면, 이 질문을 하기에 좋은 때는 따로 있었습니다.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신 이후에, 혹은 아주 놀라운 기적을 일으킨 이후에 이 질문을 하셨으면, 베드로뿐만 아니라 더 많은 사람이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고백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이 일으키신 놀라운 사건을 보고 예수님을 알아보기를 원치 않으셨습니다. 그분과의 인격적 관계 속에서 충분히 쌓인 신뢰 안에 예수님이 어떠한 존재인지를 알아보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좋은 타이밍이 아니라 바로 이때 물으신 것이었습니다. 겉모습은 화려하지 않고 오히려 남루하더라도, 세상의 시각에 갇히지 않고 예수님과의 관계 가운데 그분을 알아볼 수 있는 믿음의 고백을 원하셨던 것이지요.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같은 고백을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 세상적으로 화려한 것이 아닐지라도, 화려한 우상들 앞에서 허름한 옷차림의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자 그리스도시라는 고백을 했던 베드로와 같은 고백을 원하십니다. 세상의 기준을 만족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기 위해 귀한 고백을 하는 복된 삶 살아가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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