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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11월 25, 2024

[전남수 목사] 죄의 전염성, 미국 장로교 222차 총회와 조선 장로교 27회

전남수 목사 알칸사 제자들교회 담임(2003-현) 경북대학교 철학과 및 동대학원 졸(B.A/M.A) 고려신학대학원 졸(M.Div) Missionary Baptist Theological Seminary(Th.M) Houston Graduate School of Theology(D.Min) Central Baptist Theological Seminary 겸임교수

1. 미국 장로교 222차 총회
한국과 미국의 각 교단마다 총회 시즌이 열렸다. 그 가운데 오래전 미국 장로교 제222차 총회를 기억한다. 오리건 주 포틀랜드에서 열렸었는데, 충격적이고 놀라운 일이 발생했다. 오전 11시 성찬식을 겸한 개회 예배 후, 오후 2시부터 시작되는 전체 회의에서 당시 플로리다 올랜도에서 발생한 총격 사건과 무슬림에 의해 저질러진 많은 테러의 희생자들을 추모하며 화해와 평화를 추구하는 시간을 가졌다. 총회는 이런 의미를 더 분명하게 드러내고자, 포틀랜드 지역의 무슬림 종교지도자를 초대했다. 그리고 그들에게 단상에 올라가 인사하도록 허락했다. 그런데 그 무슬림 지도자가 그 단상에서 알라의 이름으로 수많은 목사가 모인 자리에서 기도하고 내려온 것이다.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미국 장로교에 소속된 한인 목회자들이 이의를 제기하자, 사과와 유감을 표명한 일이 있었다. 그런데 그 사과의 해명에 대해 참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게 된다. ‘이럴 줄 몰랐다는 것이다. 갑자기 예정에 없던 기도가 진행됨에 대해 자신들이 어찌할 방법을 몰랐다는 것이다.’ 필자는 그 말을 새롭게 되새겨 본다. 과연 이럴 줄 몰랐을까? 동의할 수 없다. 이 일은 성경을 보는 사람이라면 충분히 예견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럴 줄 몰랐다.’라는 말은 그저 핑계와 무지를 증명할 따름이다. 죄의 전염성에 대해 성경은 단호하게 말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모인 자리에 왜 무슬림 지도자가 단상에 올라가야 하는가? 하나를 주고 둘을 주면 셋을 내어주어야 함을 왜 알지 못하는가? 그렇게 하면 정말 저 무슬림과 기독교에 평화를 가져올 것이라 예견했단 말인가? 이 일을 보면서, 아주 오래전 뉴욕의 어느 미국교회가 교회 강대상에 스님과 불교에서 사용하는 도구를 이용하면서 설법하던 아찔한 장면을 보며 탄식했던 기억이 났다. 그런데 이 두 장면이 서로 낯설지 않게 연결되고 있다. 솔로몬은 하나님이 맡겨주신 나라를 더욱 크고 강한 큰 나라를 만들고자, 정략결혼으로 이웃 나라와 화친을 맺고 여인들을 궁전에 불러들였다. 화친을 맺는 당시에는 참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나씩 둘씩 내어 준 결과가 무엇인가? 후에는 하나님이 세운 왕의 궁전에서 우상숭배가 범접하듯이 이루어지는 비극을 성경은 명백하게 증거한다. 하나님의 진노 가운데, 솔로몬 사후에 나라가 둘로 쪼개졌다. 그런데 사람들은 성경이 이렇게 명확하게 보여주는 것을 왜 미리 보지 못하고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일까? 죄의 전염성은 요란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직 그 열매의 결과로만 판단할 수 있을 뿐이다. 혹자는 말한다. ‘이것이 뭔 호들갑이냐? 다 같이 더불어 사는 평화로운 세상을 이루어가자는 것인데.’ 또한 ‘이 미국 교단은 우리 조선 땅에 복음을 전한 교단인데, 그 은혜를 어떻게 잊을 수 있으며 버릴 수 있겠는가?’라고 변설(辨說)하기도 한다. 지도자의 이 같은 언급에 얼굴이 붉어진다.

2. 신사참배와 한국 기독교
1938년 제27차 조선장로교 총회는 신사참배를 국가 의례의식의 하나로 공식 결정한다. 이유라는 것이 해방 후 저들의 변명을 추억해 보면, 교회를 위함이라는 것이다. 신사참배를 반대한 이들이나 찬성한 이들이나, 감옥 밖에서 교회를 지키며 고생한 이들이나 감옥 안에서 순교를 각오하고 고생한 그들이 똑같다는 것이다. 모두가 교회를 위한 일을 한 것이니 서로 관용하자는 것이다. 덮고 지나가자는 것이다. 용서와 관용을 말함에 무슨 돌을 던질 수 있겠는가?
훗날, 하나님 앞에서 자신들의 죄에 대해 해명하면 될 일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동시에 참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당시 저들은 조선 땅의 영적인 지도자요, 민족의 영적 지도자들이었다. 그런 이들이 그때부터 7년 후 일본의 패망과 해방, 궁극적인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영적인 감각을 결여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놀랄 따름이다. 결국, 7년 후에 해방을 맞이했을 때, 저들은 한 번 더 자신들의 변설을 내려놓고 자신들이 영적인 둔감함을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전적으로 돌이켰어야 했다. 그러나 감옥 안에서 순교한 이들처럼, 자신들은 보이는 교회를 위해 감옥 밖에서 순교적 고생을 했다는 식으로 말했다. 이는 자신들 스스로 민족의 영적 지도자의 자격이 없음을 증명하는 말들이다. 더불어 지도자의 문제는 지도자에게서 끝나지 않는다. 그래서 저들을 따르는 수많은 민초들에게 격심한 영향을 끼치게 될 것이다. 지도자의 분별없음이 얼마나 그 백성들에게 해악인지를 열왕기의 역사를 통해서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결국, 그러한 역사적 안목을 상실한 지도자들의 무 회개는 5년 뒤 한국전쟁의 잔혹하고 피폐한 하나님의 심판을 가져왔다. 왜 이것을 하나님의 징계와 심판으로 보는가?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의 뜻이 없으면 땅에 떨어지는 바가 없는데, 그 신사참배를 결의했던 그 평양 도성이 지금 어떻게 되었는가? 김일성 가문의 우상들이 초대형 크기로 세워져 있고, 동방의 예루살렘이라 부르던 그 도시가 이제는 가장 질흙 같은 암흑의 도성이 되어버린 것이다. 1907년 평양 대부흥 운동으로 평양에서는 주일이면 가게 상점들이 문을 닫고 찬송을 부르며 예배하러 가던 바로 그곳이 지금은 어떤 노랫소리가 들리고 있는가? 그러함에도 전쟁의 상처 위에 반도의 한쪽을 남겨두시고 세계의 가장 복음의 역동성이 넘치는 한국교회를 허락하신 것은 남은 자를 붙드시고 소망을 불어넣어 주시려는 하나님의 변치 않는 긍휼과 사랑의 증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3. 1938년과 지금 이 시대
지금 이 시대를, 1938년 그때와 무슨 상관이 있길래 이렇게 연관 지어 말하고 있는가? 참으로 귀한 복음을 우리 조선에 전해준 미국 장로교회의 행태가 너무나 안타깝기 때문이다. 저들은 과연 무슬림 지도자를 단위에 세움으로 평화와 화해를 이룰 수 있을 거라고 진실로 기대했단 말인가? 더 나아가 가장 뜨거운 이슈인 동성애 문제에 대해서도 한 발자국 두 발자국 계속해서 안방을 내어주고 성경적 신앙고백과 멀어지는 상황 속에서도 여전히 관용과 이해를 말할 것이란 말인가? 그런데 적지 않은 목회자들의 반응이 놀랍다. 일반 성도들의 경우는 더 할 것이라 여겨진다. 이것이 무슨 문제가 되느냐? 같이 평화로운 세상을 이루자는 것인데, 일하다 보면 실수할 수도 있지?라는 관용을 말하고 있다. 점입가경(漸入佳境)이다. 종말 시대에, 동성애로 인해 목사가 해고되는 이 시대에. 이 문제가 필자에게만 유독 심각한 것일까? 다양한 소견에 따라, 말씀대로가 아닌 마음대로 행하는 신(新)사사시대를 본격적으로 살고 있다. 감각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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