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분이 그랬다. 글에 잘 모르는 지명이 나오기도 하거니와, 이런 곳이 정말 이스라엘에 있는지 조차 잘 모르니 머리 아프다던가. 그런 말을 들으니 미안하긴 했다. 그렇다고 해서 멈출 순 없다. 이제 나머지 골짜기들도 잠시 이야기해보자.
소렉 골짜기
쉐펠라 다섯 골짜기 중에서 두 번째는 소렉이다. 아얄론 계곡을 타고 남쪽으로 12킬로미터 정도 내려가면 소렉 골짜기를 만난다. 차를 타고 가다가 정박사님이 그냥 “이 곳이 그 곳입니다” 해서 안거지, 특별히 다른 특징이 있는 곳은 아니라고 해야 정직하다. 소렉은 사사시대에 삼손이 난리를 친 곳이며(삿 16장), 벳쉐메시(태양의 집/바알과 관련있는 이름으로 보인다)나 소라도 이곳에 있었다. 내려가다 보면 도로 표지판에 이런 옛날 도시들로 들어가는 길이 나타난다. 그럴 때가 정말 신기하다.
앞서 언급했듯이 유다산지와 쉐펠라는 동서로 연결돼 있다. 물론 쉐펠라는 남북으로 길게 누웠다. 쉐펠라과 유다 산지를 따로 떼어서 보기 보단, 연결된 것으로 이해하는 게 옳다. 소렉과 붙은 유다산지는 르바임(골짜기)이다. 블레셋이 예루살렘에 쳐들어 왔을 때, 다윗이 르바임에서 그들을 두번 씩이나 격퇴했다(삼하 5장). 르바임은 서쪽으로 내려오면서(즉, 쉐펠라 쪽으로) 중간에 케살론 골짜기로 나누어 진다. 이런 지리적 흐름이 벳쉐메쉬 쪽으로 내려오면서 소렉 골짜기와 연결돼 지중해까지 이어진다.
텔 벧세메쉬 정상에서 북쪽을 보면 앞으로 소렉 골짜기가 동서로 펼쳐져 있으며 정면에 보이는 산에 텔 소라가 있다. 텔 소라에 가면 유대인들이 만들어 놓은 삼손의 가묘가 있다고 하는데, 시간이 넉넉하지 못해서 거긴 들르지 못했다.
엘라 골짜기
다음은 엘라이다. 소렉에서 남쪽으로 8킬로미터 정도 내려가면 이곳을 만난다. 왕년에 다윗이 엘라에서 골리앗(삼상17:2)과 한판 붙었더랬다. 승부는 모두가 아는 대로, 소년 다윗의 짱돌을 맞은 골리앗이 쭉 뻗은 걸로 끝났다. 불레셋이 머리에 썼던 건 투구가 아니라 깃털로 장식한 허세스런 관이었으니 얼마든지 그럴 수 있었겠다. 바르 일란(이스라엘)에서 학위를 한 임미영 박사의 견해를 듣자면, 이런 돌들은 가히 야구공만한 크기였다고 한다. 박물관에서 본 베두인 아이들이 던지곤 한 돌을 보니 무지 컸다. 이걸 정통으로 머리에 맞으면 그야말로 한번에 가셨겠다. 다윗은 짱돌을 어디서 구했을까? 아마도 엘라 골짜기에 흐르는 물가에서 얻은 게 아닐까 싶다. 믿거나 말거나다. 관심을 끌만한 이야기를 첨언하자면, 엘라는 베들레헴으로 이어지는 길목이었다. 두 동네는 서로 약 25 킬로 미터 정도 떨어져 있다.
벳트 구브린 골짜기
네번 째는 벳트 구브린이다. 당연히 엘라에서 남으로 8킬로미터를 내려가면 골짜기가 시작된다. 이 곳 역시 그렇다니 그런 줄 아는 정도였다. 별 다른 특색은 없었다. “아, 남쪽으로 많이 내려왔네” 하는 순간에 이곳 이름을 들었다. 역대하를 보면 ‘스바다 골짜기’라는 이름으로 옛날에 불렸던 모양이다(대하 14:10). 해안지방에서 헤브론으로 올라갈 때, 빨리 가고 싶으면 이 골짜기에 있는 지름길을 이용했다고 한다. 이곳은 벳트 구브린이란 이름과 함께 ‘마레사’로 불리기도 했다.
성경적으로 ‘마레사’는 그랄땅 시삭의 장관 세라가 쳐들어 왔을 때 아사왕이 싸움 끝에 승리해서 지켜낸 곳이기도 했다(대하 14장). 동시에 선지자 엘리에셀의 고향이기도 하고(대하 30장), 미가 선지자가 남긴 글에도 언급됐다(미 1:15).
라기스 골짜기
마지막은 우리가 비교적 자주 듣는 라기스이다. 역시 구브린 골짜기에서 남쪽으로 6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쉐펠라 가운데 가장 남쪽에 위치하며, 지역의 대표적인 도시였다. 힘이 센 걸로 유명한 삼손은 술주정도 남달라서 가사의 성 문짝들과 문설주, 그리고 기둥을 뽑아서 헤브론까지 가져간 적이 있다. 씩씩대면서 길을 가던 삼손이 라기스 골짜기를 지나지 않았을까 생각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다(삿 16장). 주전 791년 앗수르의 산헤립은 이곳을 통해서 유다산지를 공격했다(왕하 18장). 그리고 주전 586년 바빌론의 느부갓네살 역시 라기스 골짜기를 통해서 유다산지에 쳐들어왔다(렘34장). 슬픈 일이다.